[황석희의 영화 같은 하루] [48]
Don’t cast your eyes, down the abyss
심연을 바라보면 안 돼
‘헨리 맥헨리’(애덤 드라이버)는
‘신의 유인원(The Ape of God!)’이라는 제목으로 공연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관객을 조롱하고 자신을 조소하는 이 공연엔 괴상망측한 대사가 차고 넘친다.
헨리는 샤워 가운만 걸치고 나와 코미디쇼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너희 복내측 전전두피질을 자극해 15개 안면 근육을 수축시켜
광대근이 반응하게 하고 후두의 후두개를 반쯤 열어줘야 해?”
관객들은 까무러치게 웃는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 ‘아네트(ANNETTE ·2021)’의 한 장면이다.
헨리는 당대의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코티야르)과 결혼하여
아네트라는 딸을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서서히 아내의 애정을 의심하며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공연을 망쳐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커리어도 추락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반대로 안은 항상 관객의 찬사를 받으며 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추락하며 서서히 심연(the abyss)이 눈에 들어오는 헨리.
헨리는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회복하자는 뜻으로 요트 여행을 제안하고
안과 함께 바다로 떠나지만 폭풍을 만나 바다 한복판에서 안을 잃고 만다.
안을 바다로 빠뜨린 것이 폭풍인지 헨리인지 심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이 죽고 아네트와 단둘이 남은 헨리는
아네트가 안에게 물려받은 재능을 갖고 있음을 깨닫고
아네트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선다.
더더욱 심연으로 향하는 헨리.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When you stare into the abyss the abyss stares back at you).”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커먼 심연을 들여다보면 추락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법.
심연에 탐닉하다 결국 파국을 맞은 헨리는 아네트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심연을 바라보면 안 돼(Don’t cast your eyes, down the aby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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