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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바르셀로나에 건축가 가우디 있듯… 류블랴나엔 플레치니크가 있었다

colorprom 2021. 12. 8. 17:38

[박종호의 문화一流] 바르셀로나에 건축가 가우디 있듯… 류블랴나엔 플레치니크가 있었다

 

입력 2021.07.12 03:00
 
 

세상에는 많은 도시가 있고, 도시마다 자랑하는 건축물들이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자신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그 중에는 건축가의 이름과 동일시되다시피 하는 도시도 있다.

이를테면 바르셀로나의 안토니오 가우디라든지 빈의 오토 바그너 같은 이들이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를 자신의 이름과 동격으로 만든 건축가가 있으니,

요제 플레치니크(Jože Plečnik·1872~1957)다.

바르셀로나가 가우디, 빈이 오토 바그너의 이름과 동격이듯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전체가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오른쪽 아래 작은 사진)의 작품이다.
류블랴나의 상징인 트로모스트베(三重橋·왼쪽 큰 사진) 등 대형 건축물부터 거리의 매점과 가로등까지
모두 그의 머리와 펜 끝에서 태어났다.
플레치니크는 빈과 프라하에서 국제적 명성의 건축가로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조국의 부름에 응답해 자신이 설계한 집의 작업실에 작은 침대(오른쪽 위 작은 사진)를 놓고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평생 헌신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그는 자신이 설계한 잘레 중앙묘지에 묻혔다.
/위키피디아·셔터스톡, 박종호 풍월당 대표
 

류블랴나는 도시의 이름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있는 사랑스러운 도시다.

‘류블랴나(Ljubljana)’의 앞부분 류브(ljub)는 슬라브어로 ‘사랑’이라는 뜻.

유럽의 다른 수도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흔히 아름다운 도시로 첫손에 꼽히는 이나 프라하 같은 수도들 이상으로 정감이 넘친다.

 

도시 중심의 언덕에 자리한 류블랴나 성을 감아 돌아가는 류블랴니차 강을 중심으로,

강에 놓인 다리들과 양안(兩岸)에 늘어선 제방과 주변의 건물들은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이 도시의 많은 건물들은 물론이고,

전체의 정비 체제가 플레치니크그 제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강의 중심에 놓인 유명한 다리 트로모스트베(삼중교·三重橋)를 비롯하여,

제방⋅아케이드⋅중앙시장⋅국립도서관⋅야외극장 그리고 중앙묘지 등

주요 건물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류블랴나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요제

오토 바그너에게 영감을 받아 그의 제자로 들어가서 의 도시 건설에 참여한다.

그리고 프라하 성의 개축 책임자가 되어 프라하의 여러 건축을 맡는다.

그렇게 그는 20세기 초에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가 된다.

 

그러나 1921년 조국에 최초의 국립건축학교가 설립되어 교수직을 제안받자,

그는 국제적인 커리어를 던지고 고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류블랴나를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조국에 바친다.

 

1931년 벽두의 추운 겨울날, 가정부 우르슈카 루자르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자신이 입주할 새로운 집을 찾고 있었다.

약속대로 국립건축학교 앞에 서 있는데, 잠시 뒤에 학교에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나비넥타이를 맨 초로(初老)의 교수가 나왔다.

무서운 인상에서 어렵고 깐깐한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어디 앉자는 말도 없이 길에 서서 우르슈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렇게 우르슈카가 일하게 된 플레치니크의 집은

그가 직접 설계한 단순한 2층집이었지만 넓은 정원과 커다란 온실이 있었다.

독신으로 혼자 사는 주인은 학교나 현장에 가기 위해 외출할 때 외에는

종일 2층 작업실에서 일을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대부분의 식사도 작업실에서 했으며, 심지어 잠도 작업실에서 잤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 동료, 조수, 제자들이 수시로 집을 방문했고,

그는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도면을 그렸다.

 

우르슈카는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차를 끓이고 집 안을 청소했다.

교수는 농부같이 소박한 식사를 했고, 그녀가 채소로 만든 시골 음식을 좋아했다.

교수는 차를 쉽게 끓이는 기계나 화분에 물 주는 장치 등을 만들어 주었다.

 

교수가 없을 때에 우르슈카는 온종일 집을 닦았다.

집의 목재와 가구들은 반들거렸고, 교수의 짙은 양복들은 낡았지만 늘 손질되어 있었다.

 

교수는 조수나 제자들에게 완벽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류블랴나의 어떤 건물이 결함이 있거나 양식적으로 맞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는 류블랴나를 사랑했고 그곳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르슈카는 부엌에서 혼자 식사했다.

두 사람만 집에 있을 때에도 둘은 각자 식사를 했고 한 번도 겸상을 한 적이 없었다.

가끔 지인들이 그녀에게 “우르슈카, 플레치니크씨와 결혼할 거예요?”라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옆에서 본 플레치니크 평생을 경건하게 살고 기품을 지키는 신사였다.

그녀는 주인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늘에서 도왔다.

단 하루가 모자라는 26년 동안 우르슈카는 그렇게 주인을 모셨다.

 

이윽고 플레치니크가 몸져누워서 마지막 몇 달간은 교수의 조카와 함께 지내면서

둘이서 그의 85년 생애의 마지막 길을 수발하여 보냈다.

 

플레치니크의 장례는 슬로베니아의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자신이 설계한 잘레 중앙묘지에 묻혔다.

 

장례가 끝나자, 우르슈카는 남의 집 살이를 그만두었다.

적은 연금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매일 류블랴나의 도심을 산책하면서,

주인이 남긴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보았다.

그녀는 건축을 몰랐지만, 작품들이 말하는 의미를 느꼈다.

 

그녀에겐 플레치니크의 사진 한 장, 유품 한 점도 없었지만,

대신에 그림 엽서를 여러 장 가지고 있었다.

플레치니크가 외국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한 장씩 부쳐줬던 엽서들이었다.

그녀는 그 엽서를 통해 외국에 있는 주인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저의 일생은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친구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건축이나 예술은 몰라요. 다만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하고 생활에 성실하고

매사에 품위를 지키면서 산 사람을 알았다는 것은 제 생애의 자랑입니다.”

 

겉으로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진짜 위대한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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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의 도시 류블랴나 류블랴나의 상징인 트로모스트베(三重橋). 바르셀로나가 가우디, 빈이 오토 바그너의 이름과 동격이듯, 사랑스러운 도시 류블랴나는 전체가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의 작품이다. /셔터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