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인사이트] 먼 곳에서 온 예술가들… 나라 잃은 이민자 아픔을 예술로
김영애 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입력 2021.09.01 03:00
파리 중심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는 1875년 나폴레옹 3세 시기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1964년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샤갈이 천장화를 그려 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작업에 참여한 한 네덜란드 예술가의 회고록을 읽어보니 당시 프랑스 일각에서 샤갈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같지 않았나 보다. 자국의 예술가라고 여기기보다는 러시아 유대인이라는 점을 부각해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샤갈은 경찰의 보호하에 작품을 마무리해야 했다.
파리의 명소 오페라 가르니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마르크 샤갈의 원형 천장화. /픽사베이·위키피디아
샤갈도 망명자… 프랑스서 핍박 겪어
만약 러시아가 공산화되지 않아 샤갈이 고국에 남을 수 있었더라면? 유대인에 대한 핍박을 피해 떠난 미국에서 크게 환영받았으니 그곳에 머물며 귀화하였다면? 샤갈은 프랑스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다시 돌아왔고 많은 작품을 프랑스에 기증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떠돌며 살다 간 개인적인 아픔이 있는 작가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요소는 그를 범세계적인 작가로, 초월적인 세계관을 가진 작가로 성장시켰음에 분명하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대부분의 예술가들 중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많다. 낯선 곳에서 마주한 생경한 풍경과 이질적인 문화가 창작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예술가들만을 위한 ‘레지던시’라는 제도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한 달 살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일정 기간 낯선 곳에 거주하며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고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비자발적으로 우리는 어딘가로 떠나며 성장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 정부 기관과 협력했던 현지인과 가족이 한국으로 입국하는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혹시 이들 중 지금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킬 존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 이유다.
베트남 '보트 피플' 난민 출신의 설치 미술가 자인보(Danh Vo)는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267개의 구리 조각으로 다시 만들어 전세계로 보내 전시하는 '우리 국민은(We The People)' 작품을 만들어냈다. 홍콩 M+ 파빌리온 전시 장면. 'We the People'(detail), 2011–2016, Copper, 126 x 92 x 28㎝, Courtesy of the artist.
조국 잃은 아픔과 트라우마를 예술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베트남 출신의 자인보(Danh Võ)다. 1975년생인 작가는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였고 네 살 때 부모님과 함께 난민 보트에 올라 덴마크로 이주했다. 덴마크의 해상 운송업자가 배를 발견한 덕분이다. 작가는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덴마크를 대표하기도 했다. 그의 남다른 경험은 정체성과 역사, 우연, 인생에 대한 무수한 질문을 담은 작품으로 펼쳐진다. 2010년 시작하여 5년의 제작 과정이 걸린 ‘우리 국민은(We People)’이 대표적이다. 이 표현은 1787년 만들어진 미국 헌법 전문을 시작하는 문구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대체 누구일까? 작가는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실물 크기로 복제한 작품에 이 제목을 붙여주었다. 프랑스에서 제작돼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건네진 것이니 이 조각상의 운명도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수많은 이민자가 세운 나라 미국 국민을 닮았다.
자인보는 좌대를 제외한 동상 높이만 약 46m에 달하는 거대한 형상을 제작하기 위해 전체를 267개로 세분하여 중국의 한 구리 공장에 제작을 주문한다. 각각의 작품은 약 2m 너비로 손가락이나 발가락 같은 특정 부위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인 형태로 파편화되어 있다. 이제 이 작품들을 모아 퍼즐처럼 하나로 맞추는 마지막 단계가 남았을 것 같은데 작가는 놀랍게도 이것들을 세계 곳곳으로 퍼트려 놓는다. 심지어 작품의 제작을 후원한 카타르의 공주가 전체를 사겠다고 나서자 최대 3분의 1조각만 가질 수 있도록 구매를 제한했다. 하나로 합쳐지면 자유의 여신 조각이 된다는 콘셉트는 실패한 유토피아에 대한 비유일까, 아니면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최후의 보루일까?
이 작품을 실제로 처음 본 곳은 홍콩 M+ 미술관의 파빌리온에서였다. 중국과 영국의 오랜 역사가 겹쳐진 이곳에는 고국을 떠나 아시아에 살고 있는 서양인들이 유난히 많고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중국인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이라는 제목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오는 11월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는 M+ 미술관은 아시아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미술관 중에서는 동남아시아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온 아라리오 미술관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인도 출신 수보드 굽타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인도 하층 계급 출신인 작가는 살아남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 정주하지 못한 채 떠도는 하층민들의 삶을 겪었고, 주목했다. 계급에 따라 서로를 구분하고, 노동을 위해 이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흔적이 짐을 한 보따리 싣고 떠나는 운송 수단으로 형상화된다.
인도 하층 계급 출신 수보드 굽타의 설치 작품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Everything is Inside·2004)’는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전시 중이다.(왼쪽 큰 사진) Everything is Inside, 2004, part of taxi, cast bronze, 162x104x276㎝, ⓒARARIO MUSEUM /아라리오 뮤지엄
이민자의 삶으로 초청하는 이민자 예술
이민자나 난민 문제에 있어서 주로 수용국의 입장이었던 서구 선진국의 미술관에서 이주의 문제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쿠바 출신의 타니아 브루게라(Tania Bruguera)는 2018년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현대 커미션 전시에 선정되면서 전시 관객들을 이민자의 삶으로 초청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려면 줄을 서서 입국 심사에 통과해야 한다. 불법 체류자 재판장이라도 된 듯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입국 심사장 앞에 서면 아무 잘못한 게 없는 사람도 괜히 주눅이 든다. 어느 호텔에 묵는지, 친구네 집의 주소와 그 친구의 직업은 무엇인지 같은 사생활까지 다 밝혀야 입국할 수 있다. 심지어 거짓말 탐지기도 동원된다.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말을 탄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위압적으로 관객들을 통제한다. 모두 연출된 것이지만, 수많은 이민자들에게는 매일 당하는 일상이다.
쿠바 출신 타니아 브루게라의 체험형 작품 ‘타틀린의 속삭임(Tatlin’s Whisper)’은 관람객이 이민자·난민에 대한 고압적 입국 심사 과정을 직접 체험토록 했다. 2012년 웨일스 국립미술관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Spectators and mounted police officers take part in shortlisted artist Tania Bruguera's performance Tatlin's Whisper #5 at the National Museum Wales as part of the Artes Mundi 5 exhibition and prize to be awarded on Thursday 29th November at National Museum Cardiff on November 26, 2012 in Cardiff, Wales.
지난봄 ‘우리 국민’은 윤여정 배우의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영화 ‘미나리’가 오스카 영화제의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미국 이민 세대의 정착 과정을 다룬 줄거리는 정이삭 감독 자신의 자전적 스토리다. 어느 곳에서든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한국인의 위대한 의지에 박수를 보냈던 것처럼, 이제 세계 곳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이들에게도 응원을 보내고 싶다. 문화는 결국 그렇게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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