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괴물을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보여줬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입력 2021.05.22 13:50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 마련된 중앙예방접종센터 모습이다.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조선일보DB
인류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경험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大戰)보다 더 거대한 죽음 앞에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눕게 되었다.
죽음은 끔찍한 일상(日常)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은 이 죽음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줬다.
지난 5월 4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스승을 만났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앞에서 이어령 선생./조선일보DB
-코로나19로 인해 죽음을 마주하게 됐어요.
죽음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일상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을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겼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달라졌어요.
죽음은 그저 우리 안에 갇힌 사자,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에 불과했어요.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죽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일종의 ‘판단 중지’지요.
그런데 저 사자와 호랑이, 즉 죽음이 길거리로 뛰어나온 거지.
죽음의 공포, 굶주린 맹수의 습격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을, 온 도시, 온 인류가 깨닫기 시작한 거야.
우리가 발 딛고 섰던 인류의 문화·문명이, 원폭(原爆)으로도 무너지지 않던 문명·문화가,
조그마한 바이러스[自然]한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지요.”
-우리가 발 딛고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문화·문명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지요.
“죽음 앞에 생(生)의 기원(origin) 마저 힘을 잃어버렸어요.
진화론자의 주장처럼
호모사피엔스가 원숭이로부터 혹은 침팬지로부터 갈라진 역사가 사실이든 아니든
아니,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 인류 창조의 비밀을 밝히신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오늘날 이 무시무시한 사자가 날뛰는 아비규환 속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린 겁니다.
혹은 민주주의가 가르쳐온 ‘자유와 인권, 프라이버시의 보장’ 같은 생명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도 말 한마디 못하고 복종하는 상황을 가져온 것이지요.”
-한국인 역시 죽음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계기가 됐어요.
“여태껏 한국인의 종교는 서구인과 달랐어요.
종교가 파국적이고 부딪히는 것, 깨지는 것, 부서지는 역사를 거쳐 온 면에서
치열하지 않았어요.
우리 신앙의 선조(先朝)들이 순교와 죽음으로 종교를 증거했으나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믿음이 점잖다고 할까요? 치열하지 않았지.
동양사상이 훌륭해서 그런지도 몰라요. (웃음)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그리스도교와는 달라요.
공자(孔子)를 떠올려 봐요. 생김새부터 온화하잖아.
제자들 중에 배신한 제자도 없고 편안해요. 수레도 타고 다녀. (웃음)
예수님에게 수레가 어디 있었어요? 심지어 맨발이야.
제자들이 있긴 있는데 공자 같은 제자들이 아녀.
공자 자제들은 먹을 것 다 벌어가지고 주군 모시듯이 했지만
예수님 제자들은 배신을 밥 먹듯 합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기적),
만선(滿船)으로, 혹은 병든 환자를 싹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줬지만 자기 살려고 배신을 했어.
공자의 제자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데 예수님의 제자와 비교 불가야.
무식한 어부들도 있고.
이처럼 아주 드라마틱한 신앙이지만 동양의 믿음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지.
저쪽(예수교)은 세기(世紀)의 승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신앙이지요.
그리스도교를 타 종교와 비교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상징이 그렇다는 거야.”
-죽음은 인간의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루 수천 명이 죽고 며칠 사이에 100만명이 확진 판정을 받으며 화장터에 흰 천으로 감싼,
코로나19로 인해 죽은 시체가 장작더미에 쌓여 있는 절망적 죽음을 생각해 봐요.
시신을 소각하는 연기가 온 천지로 가득한 그런 죽음….
얼마 전 AP통신이 ‘인도에서 화장터가 붐벼 대기하고 있는 시신들이 있다’고 보도했잖아요.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서양의 경우 확진자 급증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되었어요.
병원 화장실에 시신이 방치돼 있고
환자들이 배설물 사이에 누워 있는 모습이 공개돼 충격을 주었어요.
시신과 환자, 배설물 등이 널브러져 있는 처참한 참상을 떠올려보라고요.
K방역이 성공하고 안 하고가 아니야.”
서울 평창동 자택 거실에 걸려 있는 이어령 선생의 그림이다.
스승은 “17세기 런던 시민이 흑사병을, 죽음을 겪으며 위생 개념이 등장하고,
결국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1665년 무렵 대역(大疫), 즉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영국 런던이 아수라장이 됐어요.
런던 인구 46만명 가운데 약 10만명이 사망했어요.
끔찍한 비극을 겪고서 런던 시민들은 목재 대신, 돌과 벽돌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어요.
콘크리트와 석조 건물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쥐가 더는 창궐하지 못하게 말이야.
그러니까 동양은 목조, 서양은 석조라는 개념이 흑사병 이후 생겨난 거지.
그 이전에는 동서양이 모두 목조에서 산 거여.
물론 판테온(Pantheon) 같은 로마 시대의 신전은 특별히 석조로 지어졌지만
개인 집들은 죄다 목조야.
또 유럽 장원에서 농사짓던 농부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농부의) 몸값이 올라갈 수밖에.
산업혁명기에 발생한 사회문제 중에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건강 문제도 있었어요.
노동자의 수명이 비위생적인 전염병과 관련돼 있다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 거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도 그제야 응시하게 되었어.
또 성직자에 의한 성경의 독점, 진리의 독점이 아니라
가내수공업, 중소 상공업이 길드를 통해 협력하는 것과 같이
소수의 선(善)이 아닌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회개혁, 종교개혁,
나아가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어요.
흑사병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들인 셈이지.
지금의 코로나19도 비슷해요.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경험하게 되고,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죠.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겁니다.”
-어쩌면 코로나19가 은총일 수도 있겠네요.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살다가 처음 ‘격리’를 경험하는 거야. 넘쳐나는 시간과 마주하는 거지.
그런데 그 시간이 고문과 같은 시간이야.
숨어 있던 선한 예수님 얼굴을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코로나19가 누구에게는 은총, 누구에게는 고통인 거지.
어쩌면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예수님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을 테고,
코로나19로 격리된 공간에서 외롭게 죽어갈 때 아마 예수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코로나19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자는 말씀이지요.
“마스크를 보라고.
마스크는 나를 병균에서 보호하지만
다른 이에게 병균을 안 옮기는 이타적인 역할도 하고 있잖아요.
마스크를 쓰면서 내 얼굴이 감춰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 보여. 그게 페르소나야.
가면을 쓰면서 내 성격이 드러나는 거야. 가면무도회가 바로 그거라고.
나는 제자들이 많은데 게네가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는지 요즘에야 알게 됐어요.
일흔이 된 늙은 제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를 찾아왔어요.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주름이 하나도 안 보여. 하하하.
눈만 보이는데, 와… 눈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게 되니, 새롭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눈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제야 참된 얼굴이 드러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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