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영화]‘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colorprom 2020. 10. 14. 14:58

[남정욱의 영화 & 역사] 처칠과 히틀러 '닮은 인간, 다른 전쟁'

 

 

조선일보

 

  • 남정욱 작가

    입력 2020.02.13 03:12

    ['다키스트 아워']

    히틀러 본질은 미치광이 전쟁광… 처칠은 전쟁에 천부적인 재능
    히틀러가 서유럽 침공한 날, 짠 것처럼 처칠도 영국 총리에 올라
    한쪽은 자유와 평화 위해 능력 발휘, 다른 쪽은 그걸 파괴하려 해

    남정욱 작가

     

     

    미친놈이 미친놈을 알아본다.

    1938년 영국 총리 체임벌린히틀러와 평화협정을 맺고 돌아왔을 때

    영국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쓱해진 체임벌린은 6개월이면 휴지 조각이 될 협정문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자기가 상대하는 인간이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몰랐다.

    유대인을 절멸하고 슬라브인을 모조리 노예로 삼겠다히틀러의 공언을 은유법으로 들었다.

     

    전 유럽을 상대로 음험하고 거대한 사기극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처칠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히틀러의 본질이 미치광이이며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전쟁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아니 본능적으로 알아봤다.

    둘 다 '전쟁 친화' 유전자를 타고났으며 전쟁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면 한쪽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 능력을 발휘했다면

    다른 한쪽은 그것을 절멸하고자 의지를 불태웠다는 정도일 것이다.

    어린 시절 처칠 방을 들여다본 아버지는 기겁했다.

    방 안에 장난감 병정 수천 개가 기병 한 여단과 보병 한 사단으로 정렬해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는 일이야 동서에 흔해 빠진 유년이지만

    이렇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경우는 드물다.

    처칠의 동생도 군대를 '보유'했지만 병사들은 모두 흑인이었고 대포는 한 문도 없었다.

     

    구조적으로 처칠이 매번 이길 수밖에 없는 배치였다.

    이기는 전쟁이 어린 처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본 구도였고

    상대는 감히 대영제국에 대드는 식민지의 '컬러 피플'이었다.

     

    실제로 스물다섯이 되던 해 처칠

    아프리카 수단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혐오스러운 이슬람인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욕망에 시달리고 있어요."

    무슬림이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어서 강렬하고 원초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명백하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청년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이를 군인으로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관학교에 두 번 떨어진 후에 겨우 합격했는데 보병이 아니라 기병이었다.

    기병은 말을 사야 했으므로 돈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 말고는 쓸모없고 재능 없고 희망 없는 3무(無) 아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을.

     

    병과야 어떻든 군인이 된 처칠은 날개를 달았다.

    쿠바인도에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보어 전쟁에서는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서

    전쟁 영웅 소리를 들었다.

     

    처칠은 자신이 전쟁에 천부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전투에 뛰어들었을 때의 그 행복감, 그리고 샘솟듯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의 세례에

    그는 미칠 듯한 열정에 휩싸였다.

     

    그가 또 다른 재능을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다. 글을 쓰는 일이었다.

    명성을 얻고 싶어 안달 난 청년에게 이만큼 좋은 경로는 없었다.

    주요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처칠은 억대 수입을 올렸다.

     

    정치적으로도 서광이 비쳤다.

    다소 부풀려진 경력과 뛰어난 말솜씨로 그는 스물여섯 나이에 하원 의원이 된다.

    이어 정부 요직을 하나씩 밟아나가지만

    해군 장관이 되어 벌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 패배로 그는 나락으로 처박힌다.

     

    캄캄한 처칠의 인생에 손을 내밀어 준 것은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서유럽을 침공한 '낫질 작전'을 벌인 1940년 5월 10일,

    처칠도 마치 짠 것처럼 총리 자리에 오른다.

    동맹국은 모조리 항복하고 국민 여론은 협상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처칠'피와 땀과 눈물' 같은 무시무시한 연설을 하며

    가끔 설득, 주로 독선으로 18개월을 히틀러와 맞서 싸웠다.

     

    당시 처칠을 영상에 옮긴 것이 영화 '다키스트 아워'다.

     

    처칠은 왜 협상 대신 전쟁을 택했을까.

    영화 속에 힌트가 있다.

    '일개 상병 따위가'히틀러를 계급적으로 밟더니

    '악랄한 페인트공'이라며 싸구려 화가였던 전력(前歷)을 비하한다(자기도 그림 좋아했으면서).

    같은 혈맥이지만 금수저가 흙수저에 대해 품은 불쾌함과 혐오

    처칠의 고투(苦鬪)를 가능하게 해 준 동력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의심해 볼 수밖에 없는 영화가 '다키스트 아워'다.

     

    처칠히틀러'닮은 인간, 다른 전쟁'은 또 다른 처칠 영화 '덩케르크'를 통해 이어서 말씀드리겠다.

    미쳐도 올바르게 미친 인간이 어떤 것인지 처칠은 제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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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13/2020021300001.html

     

     

    이대위(tige****)2020.02.1310:37:10신고
    ‘닮은 인간’이지만 영국의 제도정신 또는 헌법정신이 처칠을 만들었고

    자유와 평화 위해 능력 발휘하는 원동력이 됐다. …

    같은 혈맥이지만 원하는 제도정신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70년전 남북정쟁이 이와 비교된다.

    이승만대통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승희(sunny****)모바일에서 작성2020.02.1306:46:27신고
    다키스트 아워 추천합니다.

    다들 평화를 부르짖는데 처칠은 전쟁을 준비합니다.

    지금 이 나라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13/2020021300001.html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지금 우리에겐 처칠이 필요하다

     

    남녘의 누구라도 사살할 수 있고 남한 전역 타격할 방사포 구축한 채

    그 입에서 나오는 ‘사랑… 남녘 동포’ 그 말을 믿는가?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입력 2020.10.14 03:00

     

    # 지금 대한민국은 제정신이 아니다.

    코로나 때문도, 추미애 때문만도 아니다.

     

    자국의 국민이 피살되고 소각당해도 멀뚱하니 쳐다만 보고 손 놓고 있다가

    제대로 된 항의는커녕 그 진위조차 알 길 없는 낱장 통지문 한 통에

    그나마 간접화법으로 담긴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계몽 군주’ 운운하며 감읍해 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자국민 피살, 소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항의 성명은커녕

    피살자 아들의 애절한 공개 편지에 대해서마저 “해경의 조사 및 수색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메시지만 던져놓고서 또다시 종전 선언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북한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자정에서 새벽 3시까지 펼쳐진 퍼레이드를 통해

    막대한 무력을 과시하며 종전 선언 운운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옹색하게 만들었다.

    /일러스트=김성규

     

    # 비록 그들은 자위용이라 말하지만

    공화국의 존재를 위협하면 언제든 선방을 날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언명하는 것을 보고도

    대한민국의 안위를 떠맡아야 할 대통령으로서

    그토록 섣부르게 ‘종전 선언’을 입에 담았던 것이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30분 가까운 연설 중에서 채 30초도 안 되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는 한마디에 청와대와 여당은 또다시 고무되어 흥분하지 않았던가.

    보기만 해도 지릴 만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탄두에 장착된 핵을 머리에 이고

    남한 전역을 타격하고도 남을 그 막대한 사거리의 수많은 방사포의 포구가 우리를 향해 있는

    이 엄중한 현실은 외면한 채

    남북 간의 새 물꼬 트는 것에 대한 기대로만 부풀어 있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 나치는 극적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야간에 집회를 갖곤 했다.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치스 당대회가 신호탄이었다.

    지난 10일 새벽의 북한 노동당 창건일 퍼레이드를 보면서 나치히틀러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신들린 듯한 장광설과 김정은의 만연체 연설도 어딘가 닮았다.

    특히나 나치당원들의 감격에 벅찬 표정과

    평양 시민들(그들은 물론 전부 노동당원일 게다)과 인민군대 군인들의

    경외감에 사로잡힌 듯한 흐느낌은 거의 판박이 수준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북한 노동당 창건일 퍼레이드

    편집도 없이 통째로 시청하게 되는 나라가 되었나?

    도대체 여기가 대한민국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가?

    문재인이 대통령인지 김정은이 최고 영도자인지 구분도 안 될 지경이다.

     

    # 지금부터 80여 년 전인 1937년부터 1940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체임벌린

    히틀러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938년 9월 30일 체임벌린히틀러뮌헨 협정을 맺고 귀국해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히틀러의 친필 서명이 담긴 협정 서약서를 흔들며

    “여기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히틀러체코슬로바키아를 병탄하며

    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다시 6개월이 지나 히틀러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마침내 전쟁 위기 속에서 평화를 지켜냈다던 체임벌린

    속수무책으로 1940년 5월에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 뒤를 처칠이 이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유화론자였다면,

    처칠은 그런 위장 평화의 허울을 직시하고

    히틀러와는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문재인 대통령은 히틀러를 믿었던 체임벌린을 닮았다.

    역으로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공 굴리듯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겐 처칠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 영국 출신 배우 게리 올드먼에게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에서 올드먼이 분한 처칠은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승리가 없으면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처칠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 40만명을 나치의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시킨다.

    그리고 그는 영국 국민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고 마침내 이긴다.

     

    윈스턴 처칠이 말하지 않았던가.

    “계속 싸워 나가는 나라는 다시 일어서고, 소리 없이 항복한 나라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단 한 사람의 생명일지라도 지켜낼 수 있는 한 지켜냈어야 마땅하거늘

    무자비하게 피격당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손 놓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대한민국의 존립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면 과장된 것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의 존립 가치는

    북한이 자신들의 보건적 차원에서의 존립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피격하고 소각했던

    그 한 생명을 지켜내는 데 있었다.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녘의 누구라도 조준 사살하고 소각할 수 있는 이들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있고, 우리 모두를 공멸시키고도 남을 핵을 우리 머리 위에 얹어놓은 채

    남한 전역을 언제라도 타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방사포를 곳곳에 깔아놓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란 말은 입에 발린 말일 뿐이다.

     

    역사는 반복하진 않지만 분명한 교훈이 있다.

    히틀러와의 협정서가 휴지 조각이 되었듯이,

    김정은과의 그 어떤 약속도 그의 핵미사일과 방사포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겐 더욱더 히틀러와 손잡으려 했던 체임벌린이 아니라

    그에 맞섰던 처칠 같은 인물이 절실한 것이다.

     

    아, 우리의 처칠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