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힘 있든, 힘 없든 소고기 한 근은 같아야 한다
조선일보
입력 2020.07.30 03:14
공적·적폐가 제멋대로인 세상…
소고기 한 근의 기준이 권력자 입맛 따라 다른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인열 사회정책부 차장
"역대급 치적을 남긴 왕들의 공통된 업적이 무언지 아는가?"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들은 얘기다. '도량형 통일'이었다.
도(度)는 길이, 양(量)은 부피, 형(衡)은 무게를 말한다.
그러고 보니 도량형 통일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초석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가면 중국 진시황이 그 시초다.
15년간 집권한 그가 만들어 낸 도량형 통일은 2000여 년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역시 '미터법'으로 대표되는 도량형 통일을 일궈냈다.
우리도 고려의 정종, 조선의 세종·영조 등이 그랬고,
개화기의 갑오경장 역시 도량형 통일을 내걸었다.
박정희 정권 때 '엿장수 가격'을 대신해 내세운 '정가제'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왜 도량형 통일이 중요할까.
과학을 발전시키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시대를 상상해보자.
고기 한 근을 사려고 점포에 갔더니 손님에 따라 500g, 100g 등 제각각 준다면
누구는 횡재했다고, 누구는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옷감 한 필을 사려는데 여기는 2m고, 저기는 1m라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 도량형은 정치의 으뜸 명분인 '공정(公正)'의 가치를 세우는 척도였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고기 한 근, 옷감 한 필의 도량형을 속일 방법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도량형을 통해 구현하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인간의 소망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심정을 최대한 활용해 집권한 이들이 현 정권이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는 공정과 정의의 도량형은 어이가 없다.
'조국' '울산 시장' '유재수' '윤미향' 같은 단어는 수많은 국민에게 '도량형 파괴'와 동의어이다.
자기편은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나도 무죄 추정이지만
상대방[敵]은 의혹만 불거져도 범죄자 낙인을 찍는다.
자기편은 공적(功績)에 대한 가산점이 무한대이고, 상대편은 과실에 대한 감점이 무한대이다.
최근 백선엽과 박원순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기형적 지배 구조의 공수처가 두려운 것도
이 기관이 검찰 개혁은커녕 '도량형 파괴처'가 될까 봐서이다.
이런 공포심은 최장집 등 진보 진영에서도 터져나오고 있다.
도량형 파괴의 최종 목적은 권력자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고등학생이 의학 논문에 '제2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표창장을 조작해 대학에 입학해도,
그 사람이 '조국씨의 딸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른 도량형이 있음을 공부해야 한다.
보수 진영 학자인 KBS 이사는 커피 한 잔 비용 처리까지 탈탈 털어 내쫓지만
윤미향씨는 코 묻은 돈까지 들어간 최소 수억원의 사용처를 대지 못해도
정권 차원에서 방패를 쳐주는 도량형을 학습해야 한다.
'검·언 유착' 논란을 보라.
진중권의 말처럼 KBS 등 방송이 민주화 이후 이렇게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적이 있는가.
조만간 권력의 입맛에 따라 '검·언 유착'과 '검·언 공조'가 구별되는 현상을 봐야 할지 모른다.
도량형 통일의 기본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소고기 한 근의 도량형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는 얘기다.
권력자와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도량형이 달라지는 게 불(不)공정이요, 반(反)정의다.
프랑스 혁명 직전엔 왕족과 귀족이 맘대로 만든 15만여 개의 도량형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기존의 도량형까지 무너뜨리는 세력이
'정의 바로 세우기'를 우기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다.
5공 세력 '정의 사회 구현'의 데자뷔다.
이런 건 진보가 아니라 퇴보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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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9/20200729047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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