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조선일보
- 이혜숙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저자
입력 2020.07.22 03:00
어느 교사가 쓴 글을 읽었다.
"중학생 때 앓아누워 학교에 못 가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다.
부엌을 거쳐 출입하게 되어 있던 좁은 방으로 들어온 선생님은
말없이 창문으로 가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는 누워 있는 내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이렇게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사는구나. 그래서 네 마음이 그렇게 넓었던 게로구나.'"
그 교사는 이어 이렇게 적었다.
"그때 집에 오신 선생님이
'네 형편이 이랬구나. 동생들이 이렇게 많은 집에서 사는구나' 했다면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은 롤 모델인 그때의 담임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혜숙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저자
나의 학창시절에 '학원'이나 '여학생'보다 더 재미있는 잡지가 있었다.
급우 중 누군가 주간지를 가져오면 다들 열광했다.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순서를 정해 돌려 봤다. 너 다음 나, 그리고 다음 누구.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았던 시절,
궁금한 것 많은 청소년의 호기심을 해소시켜주던 잡지였다.
내 앞의 아이가 하필이면 수업 시간에 뒤로 넘겨주었다.
당황하여 선생님을 보았고, 선생님도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길 기다렸다.
내 자리는 창 쪽이었다.
선생님은 칠판을 두드려 학생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다음 그 시절 교사들이 늘 쥐고 다니던 매를 높이 들어 복도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나도 안 보는 잡지가 돌아다니는 것 같다. 조심해라."
그것으로 끝내고 선생님은 수업을 계속하셨다.
그때 만일 내가 앞으로 불려나가 가죽 출석부로 맞았거나
전교생이 다 지나가는 복도에 문제의 그 잡지, '선데이 서울'을 들고 서 있거나 하는
징벌을 받았다면 그 이후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까.
들킨 죄로 내 이름 위에 덧씌워졌을 편견 어린 시선을 견뎌내기 쉬웠을까.
그날의 일은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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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2/20200722001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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