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소설]정세랑, '시선으로부터'

colorprom 2020. 7. 20. 15:02

[밀레니얼 톡] '최종적인 가해'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을 응원한다

 

 

조선일보

 

  • 조은 변호사

 

 

입력 2020.07.20 03:10 | 수정 2020.07.20 11:38

 

/박상훈

 

얼마 전 추천을 받아,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를 읽었다.

소설은 예술가 '심시선'과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작가는 이 소설이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필자는(우리 모두는) 최근, 소설 속 이야기가 책을 덮으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현재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시선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작가가 숨겨놓은 수많은 보물 중에서도,

어린 시선이 교육의 기회를 갈망하며 독일에서 지내던 시절

명망 있는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에게서 경험한 폭력과,

그러한 폭력에서 살아남은 시선의 삶에 대해 나누고 싶다.

마우어는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도와준 시선에게,

그림에 재능이 있으니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설득해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훗날 시선은 "탁월한 재능이 엿보인다고, 좋은 기회를 주겠다고,

나에게 관심 있어 할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후하게 제시하는 사람을

그냥 믿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경험 부족에서 비롯한 잘못된 판단으로,

유명하고 힘있는 남자의 손에 떨어진 여러 여성 중 한 명이었다"라며 자책하고 후회한다.

 

정작 자신의 행동을 탓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음에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시선이 '왜 더 빨리 벗어나지 못했는지' 후회하며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늘어놓는 것이다.

조은 변호사

 

그러나 시선의 손녀인 '화수'는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더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며

위로한다.

위로의 대상은 화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소기업 사장인 기민철화수가 다니던 회사가 자신의 회사를 도산시켰다며,

화수를 포함한 한 무리의 여직원들에게 염산병을 던진다.

기민철은 순순히 자수하여 3개월간 구금되지만,

초범이며, 반성하고 있고, 희석한 염산을 사용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목을 매어 자살한다.

 

피해자는 아무것도 배상받지 못했다.

범죄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마티아스 마우어에게 끌려온 시선은 어떻게 되었는가.

"코넬리우스 거리의 그 집에서 나는 다락에, 그늘에 존재했다. …

나는 잡역부였고 조수였고 아주 가끔 제자였다.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분풀이 대상이었고 말이다."

 

이런 날들이 몇 년씩이나 계속되었다.

시선은 살아남고 싶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느낀 시선은 용기를 내어 마우어로부터 벗어난다.

그러자 마우어는, 자살을 택한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거리 쪽을 택해 몸을 던진다.

 

시선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마녀가 되었다.

그녀에 대한 위협들은 도를 넘어섰다.

마우어가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임이 명백함에도,

시선마우어가 사람들에게서 애도받은 만큼 자살의 원인으로 비난받으며

2차, 3차 피해를 입었다.

시선은 말한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은, '살아있는 사람'은 시선이다.

시선은 타인의 공격성을 알아볼 수 있게 된 만큼,

다른 사람들의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절망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딛고 일어나 오롯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삶을 멋지게 펼쳐낸다.

 

이러한 시선의 삶은 그 자체가 영감(靈感)이자 원동력이 된다.

끝나지 않는 시작이 된다.

'시선으로부터,'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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