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장엄한 죽음의 가면무도회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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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입력 2020.07.20 03:20
가식의 정치 무대서 오랜 주역이었던 박 시장
그의 마지막 숨을 조르고 그 죽음을 미화한 권력의 가면무도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원기 왕성한 정복자들에게 율법 준수란
멍청이에게나 적합하며 활기 없고 열의가 결여되어 있어 내키지 않는 일이다. …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술을 마시고 살인하고 사랑하지도 못한다면
그들이 세상을 정복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철학자 러셀이 '서양철학사'(서상복 역)에서 서술한 세속 권력의 본성이다(22쪽 발췌 정리).
2020년 한국 사회의 권력은 이 같은 야만적 본성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이른바 "정의롭고 선한" 권력의 허상은 벗겨질 만큼 벗겨져
더는 기대할 것도 놀랄 일도 없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과 배신감에 우리를 또다시 몸서리치게 한다.
필자는 박 시장이 행한 잘못에 앞서 그의 극단적 선택에 비통한 분노를 느낀다.
하늘 아래 그 누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살아가는가.
죄를 지었다 한들 어떻게 그리 무참하게 삶을 저버리는가.
그의 죽음은 "공소권 없음"이란 한마디로 종결할 수 없다.
그의 사망과 관련된 팩트들을 낱낱이 밝혀 반복되는 죽음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
무엇이 그를 그리도 빨리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는가?
지난 7월 13일, 극명한 대조 속에 연출된 한국 사회의 두 장면은
이 의문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찰 기회를 제공한다.
첫째는 박 시장의 영결식,
둘째는 성추행 피해자 측 기자회견이다.
전상인 교수(서울대)가 최근 번역·출간한
제임스 C 스콧의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에 따르면,
전자는 지배 집단의 공개 대본(public transcript),
후자는 그에 맞선 저항 집단의 은닉 대본(hidden transcript)을 표상한다.
열병식, 취임식, 장례식 같은 공식 의례는
지배 집단들이 밖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공개 대본의 으뜸이다.
이를 통해 지배 집단은 자신들에 대한 장관(壯觀)을 연출한다.
50만이 넘는 반대 국민청원을 무릅쓰고 수행된 박 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이 그 전형이었다.
아침 8시 반, 고인에 대한 묵념과 추모 영상 상영으로 시작된 영결식은 장엄했다.
그의 오랜 정치적 동지들, 시민 대표, 유족 대표가 비감한 목소리로 그의 공적을 추도했다.
영정 앞에 하얀 꽃이 쌓였고, 식장 전면에 "시대와 나란히, 시민과 나란히"라는 문구가 빛났다.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비가(悲歌)가 가슴을 저몄다.
사자(死者)에 대한 미화를 통해 권력 집단의 적법성, 엄숙함, 고결함의 연대를 다지는 장이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한국성폭력상담소 및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들과 피해자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여성 인권 시민단체가 주축이 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인권 시민운동가였던 박 시장의 통신 음란 행위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등을 고발했다.
캐주얼한 차림, 협소한 장소 등 의례는 최소화되었지만
저항과 분노의 기운이 충만한 선전포고의 장이었다.
권력에 눌려 있던 은닉 대본이 단숨에 폭발하듯 공개되면서,
정치적 전율이 모두를 감전시킨 무대였다.
둘 중 무엇이 진실의 장이었는지는 볼 것도 없었다.
필자는 박 시장이 유난히 추잡한 권력자였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그저 헌신적인 시민운동가의 외피 속에 인간적 욕망을 감춘 한 명의 자연인이었을 것이다.
천만 도시의 행정을 좌우하는 거대 권력,
그리고 남들 눈을 벗어난 막후 공간(6층의 폐쇄된 집무실과 개인 보좌진)은
이 욕망이 통제를 벗어날 개연성을 높였을 것이다.
권력 도취와 일탈의 조건들이 일상화되면서 그는 어느덧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려 응당한 죗값을 치르면 될 일이었다.
살아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온당한 길이었다.
박 시장의 죽음은 그에게 이 선택이 열려 있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정의롭고 선한" 겉모습을 지키는 일은 정치 권력 유지의 핵심 사안이다.
특히 현실 기반의 실용적 목표에 앞서 이념적 도그마에 매달리는 진보 권력에
이는 그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하는 목표다.
그 가식의 정치 무대에서 오랜 기간 주역을 담당했던 박 시장은
"어디선가" 전해온 연락에 그의 운이 다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가 속한 권력 집단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가면이 벗겨진 이후의 행로는 자명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마지막 숨을 조르고,
다른 한편으로 그 죽음을 미화한 비정한 권력의 가면무도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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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0/20200720000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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