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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79] 이타적 이기주의

colorprom 2020. 6. 23. 16:52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79] 이타적 이기주의

 

조선일보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입력 2020.06.23 03:12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얼마 전 동료 외국 학자가 우리말로 번역돼 나올 자신의 책에 서문을 썼는데

읽어줄 수 있겠느냐 물어왔다.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고 글을 받아 읽어 내려가는데 적이 불편한 대목이 나타났다.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한국 미국 사회를 비교하며

그는 한국은 집산주의(collectivist) 사회라서 방역 당국의 마스크 착용 지시를 잘 따랐지만

미국인은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통제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펼쳤다.

K방역의 성공을 두고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평가를 내리는 이들을 종종 본다.

우리 문화가 유교를 바탕으로 형성됐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원래부터 순종적이라는 설명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권력기관의 지침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나는 이런 주장이 굴종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21세기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 동료에게 장문의 반박문을 보냈다.

한국과 미국 사회의 시민 참여는 다름 아닌 민도 차이를 반영한다고.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덧 바이러스의 속성과 방역 대책의 타당성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해 올바르게 행동할 만큼 지적으로 성장했다.

그에 비해 정부의 이동 제한 조처에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몇몇 미국인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이해력 부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미세 먼지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마스크 착용에 익숙해져 있던 것은 사실이다.

미세 먼지 방지용 마스크 착용은 순전히 이기적 행동이다.

코로나19 상황은 좀 다르다.

저변에는 여전히 이기적 동기가 깔려 있지만

이번에는 내가 남에게 바이러스를 옮기지 말아야겠다는 이타적 발로가 함께 작동한다.

그래서 자진해서 불편을 감수하며 기꺼이 착용한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집산주의 사회가 아니다. 성숙한 개인주의 사회다.

 

결국 그는 이 부분을 서문에서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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