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비평가 김현 30주기 (박해현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20. 6. 4. 14:00

[박해현의 문학산책] 내 칼로 나를 치리라

 

조선일보

 

 

 

입력 2020.06.04 03:11

이달 말 30주기 맞는 문학 비평가 김현 재조명 활발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삶의 복원력이 중요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이 통째로 휘청거리는 충격이 발생했지만,

그래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사람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

 

정현종(81) 시인의 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도 생각난다.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라고 읊게 된다.

 

'둥근 공'의 '이응'이 '통통'이란 의성어를 머릿속에서 튀어나오게 하고,

그 '이응' 때문에 의식은 '동그라미'를 그리게 된다.

어쩌면, 무의식에서 '동그라미'가 슬금슬금 기어나오면서

아주아주 어릴 적 놀이터로 돌아가게 하는 시간의 순환 운동인지도 모른다.

문학 평론가 김현(1942~1990)은 정현종의 시를 놓고 이렇게 풀이했다.

 

"둥근 공, 원은 쓰러지는 법이 없으며

항상 가볍게 떠올라 곧 움직일, 곧 놀 준비가 되어 있는 최선의 꼴이다.

원은 놀이의 표상이다.

그 원의 놀이를 시인은 꿈꾼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시다."

 

이어서 그의 비평 또한 시와 함께 뒤엉켜 둥글게 굴러가면서 논다.

'튀는 공'을 계기로 탄력이 있는 이미지를 연상하더니, "공 같은 젖과 궁둥이를 불러낸다"고 했다.

 

정현종의 시 세계에서

'불타는 혀'라든지 '입술을 지닌 하늘'이나 '땅의 젖꼭지', '세상의 옆구리' 같은 육체 이미지를 골라냈다.

김현

"그것이 시인이 사물에서 육체를 느끼고 있음을 입증한다.

사물은 사람처럼 육체를 갖고 있다.

그 사물들과 왜 시인이 같이 놀 수 없겠는가?"라고 감탄했다.

 

김현의 비평은 작품을 근엄하게 심판하거나, 처참하게 해부하지 않았다.

시인이 사물과 교감하는 놀이판에 비평가가 합류하는 '공감의 비평'을 실천했다.

/일러스트=양진경

 

김현은 1990년 6월 27일 48세에 병환으로 작고했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를 지낸 그는 외국 문학을 수용하고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문학에 창의적으로 접목시킨 비평가였다.

프랑스 현대문학 이론이 '김현'이라는 통관 절차를 거쳐 한국에 진출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쓴 '프랑스 비평사'는 불문학도뿐 아니라 모든 평론가 지망생들의 필독서였다.

 

김현은 "시를 쓰기엔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고, 소설을 쓰기엔 현실과 싸울 힘이 없다"고

스스로 낮추면서 평론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시에 버금가는 말의 울림을 남겼고, 소설 못지않게 현실의 숨은 구조를 들추어냈다.

지금도 뛰어난 비평가들이 몇몇 있지만, 솔직히 김현을 완벽하게 대체할 만한 인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김현은 글만 잘 쓴 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 새로운 우리말 문체를 개척한 창조인이었다.

서양어로 사유하면서 한글로 표현하게 된 '4·19 세대' 문학을 대표한 문체의 개발자였다.

 

그는 골방에 갇혀 글만 쓴 게 아니라,

동시대 글쟁이들과 숱하게 어울려 술판을 벌이면서 토론을 서슴지 않았고,

젊은 후배들을 뜨겁게 격려한 '인생의 등대'였다.

 

김현보다 더 뛰어난 비평가는 나올 수 있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시대 이후 김현처럼 살가운 비평가는 여간해서는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올해로 김현 30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계간 '문학과 사회' 여름호는 김현 특집을 꾸몄고,

7월 4일 연세대에서 김현 30주기 학술대회가 열린다.

 

개인적으론, 김현의 산문집 '사라짐, 맺힘'에 실린 글 '두꺼운 삶과 얇은 삶'(1978년)을 다시 읽었다.

그는

"사람은 자기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겨야 살 수 있다.

그 숨김이 불가능해질 때에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살 수밖에 없다.

무의식은 숨김이란 생생한 역동성을 잊고 표면과 동일시되어 메말라버린다"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권력과 재력, 학력을 향해

사회 구성원들이 동일한 목적을 지닌 채 몰려가는 욕망의 획일화를 비판했다.

당시 아파트 투기 열풍과 아파트 내부의 평면 구조에 빗대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입체감과 두께를 잃고 얇아진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모순.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치리라. 바로 나를!"이라고 자아비판을 했다.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후안무치가 판치는 세태를 맞아

위선에 저항하고 자기 망상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 김현 선생님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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