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5.05 03:12 | 수정 2020.05.05 09:55
[211] 1698년 대기근과 청 강희제의 곡식 원조
17세기 소빙기 이상기후 조선은 '산 사람 잡아먹는' 극심한 기근
1697년 숙종 결단, 청 강희제에 구원 요청… 유·무상 5만석 구휼미 받아
노론 강경파들 "오랑캐 쌀 먹느니 굶어 죽겠다"
1700년 부여 부산 산기슭에 병자호란 복수 다짐 刻石
1704년 명황제 만동묘 건립, 1706년 원조 실무 처벌 요구
실무자는 병자호란 주화파 최명길 손자 최석정
정치논리로 현실 못 보는 아둔한 지도자들
충남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마강 건너 작은 산이 있다. 물에 떠내려온 산이라 해서 '부산(浮山)'이다. 부산에는 대재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클 대(大)에 어조사재(哉)에 집 각(閣)이다. 전(殿)에 이어 궁궐에서 둘째로 큰 건물을 '각'이라 하는데, 이 작은 집 이름이 대재각이다.
안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병자호란의 치욕에) 극심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구나.' 1650년 12월 30일 영의정 이경여가 올린 사직 상소에 갓 취임한 효종이 내린 답이다.
효종은 병자호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이후 공식 문서에도 청나라 연호 '숭덕'을 쓰지 않던 강경파였다. 이를 고깝게 본 청 황실은 조선 정부에 "이경여를 시골로 보내라"고 압력을 넣은 터였다. 효종은 사표를 받으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일모도원)'고 안타까워했다.(1650년 12월 30일 '효종실록')효종이 말한 '일모도원'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뜻도 숨어 있다.
훗날 송시열이 위 여덟 자를 크게 써서 이경여 문중에 주었다. 여덟 글자 가운데 '너무나도' 혹은 '지극히'를 뜻하는 '至(지)' 자가 가장 컸다. 또 훗날 이경여의 손자 이이명이 고향 부여 바위에 이를 새기고 비각을 지었다. 임금 말씀을 모신 곳이라 해서 '큰 말씀을 모신 각(閣)'이라 했다. 1700년이었다.
때는 전 지구적으로 극심한 가뭄을 겪는 소빙기(小氷期)였다. 조선은 굶주린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 옷을 벗겨서 입는(噉生人之肉 剝死屍之衣·담생인지육 박사시지의)' 대참극의 시대였다.(1697년 2월 10일 '숙종실록')
17세기 조선을 침몰시킨 대기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3~1594년 계갑대기근부터 정묘호란 전후 병정대기근(1626~1629년), 1670년과 1671년의 경신대기근은 모두 '대(大)'가 붙는 초대형 참화였다. 그리고 1695년 2년 연속 또 대기근이 덮쳤다. 을해년과 병자년을 휩쓴 이 기근은 '을병대기근'이다.(김문기, '강희제의 해운진제와 조선의 반응', 역사학연구 53, 2014)
안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병자호란의 치욕에) 극심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구나.' 1650년 12월 30일 영의정 이경여가 올린 사직 상소에 갓 취임한 효종이 내린 답이다.
효종은 병자호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이후 공식 문서에도 청나라 연호 '숭덕'을 쓰지 않던 강경파였다. 이를 고깝게 본 청 황실은 조선 정부에 "이경여를 시골로 보내라"고 압력을 넣은 터였다. 효종은 사표를 받으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일모도원)'고 안타까워했다.(1650년 12월 30일 '효종실록')효종이 말한 '일모도원'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뜻도 숨어 있다.
훗날 송시열이 위 여덟 자를 크게 써서 이경여 문중에 주었다. 여덟 글자 가운데 '너무나도' 혹은 '지극히'를 뜻하는 '至(지)' 자가 가장 컸다. 또 훗날 이경여의 손자 이이명이 고향 부여 바위에 이를 새기고 비각을 지었다. 임금 말씀을 모신 곳이라 해서 '큰 말씀을 모신 각(閣)'이라 했다. 1700년이었다.
때는 전 지구적으로 극심한 가뭄을 겪는 소빙기(小氷期)였다. 조선은 굶주린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 옷을 벗겨서 입는(噉生人之肉 剝死屍之衣·담생인지육 박사시지의)' 대참극의 시대였다.(1697년 2월 10일 '숙종실록')
17세기 조선을 침몰시킨 대기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3~1594년 계갑대기근부터 정묘호란 전후 병정대기근(1626~1629년), 1670년과 1671년의 경신대기근은 모두 '대(大)'가 붙는 초대형 참화였다. 그리고 1695년 2년 연속 또 대기근이 덮쳤다. 을해년과 병자년을 휩쓴 이 기근은 '을병대기근'이다.(김문기, '강희제의 해운진제와 조선의 반응', 역사학연구 53, 2014)
임란 때는 '길에 쓰러져 죽은 시신은 붙어 있는 살점이 없고, 사람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참극이 벌어졌다.(1594년 1월 17일 '선조실록') 정유재란이 끝나고 명나라 군사는 남은 군량미 12만 석을 조선에 넘기고 돌아갔다. 조선 정부는 "온 나라 신민과 함께 감격하고 더욱 자강하도록 계책을 도모하겠다"고 감사 자문을 보냈다.(1601년 4월 25일 '선조실록')
17세기 지구를 바꾼 소빙기
17세기 인류는 문명이 시작된 이후 가장 추운 시기를 경험했다.(조지형, '17세기, 소빙기, 그리고 역사 추동력으로서의 인간', 이화사학연구 43, 2011) 이를 사람들은 '소빙기(小氷期)'라고 부른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 후금 태종 홍타이지는 곡식 국경 시장 개설을 강력하게 요구했다.(1627년 12월 22일 '인조실록') 명나라는 1639~1642년 기황(奇荒·기이한 가뭄)이라 부르는 기근을 넘지 못하고 청에 멸망했다. 일본에서는 간에이 대기근(1641~1643)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김문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2012)
청과 조선의 가뭄 대책
소현세자가 심양에 끌려가 있던 1640년 청나라 또한 기근에 시달렸다. 결국 청은 소현세자 일행에게 곡물 지급을 중단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1645년 청 황실은 조선에 구휼미 20만 석을 요구했다. 가뭄이 극심했던 조선은 이를 10만 석으로 깎아 북경과 심양으로 보냈다.(김문기, 2012)
1695년 을해년 10월 8일 숙종이 말했다. "올해 기근이 거의 경술·신해년보다도 심하다."(1695년 10월 8일 '숙종실록') '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 현종 때 벌어진 기근이다.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00만이었다. 1671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에 곡식을 요구하자(청곡·請穀)고 제안했다. 남인인 영의정 허적은 인조 때 10만 석 강제 지원을 들어 반대했다. 1675년 숙종 1년 남인 윤휴가 다시 청곡을 제안했다. 이번에도 허적이 반대했다. "청나라 은혜는 받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不欲受恩於淸也·불욕수은어청야)." 제안은 또 무산됐다.(1675년 7월 27일 '숙종실록')
을병대기근과 숙종의 결단
17세기 지구를 바꾼 소빙기
17세기 인류는 문명이 시작된 이후 가장 추운 시기를 경험했다.(조지형, '17세기, 소빙기, 그리고 역사 추동력으로서의 인간', 이화사학연구 43, 2011) 이를 사람들은 '소빙기(小氷期)'라고 부른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 후금 태종 홍타이지는 곡식 국경 시장 개설을 강력하게 요구했다.(1627년 12월 22일 '인조실록') 명나라는 1639~1642년 기황(奇荒·기이한 가뭄)이라 부르는 기근을 넘지 못하고 청에 멸망했다. 일본에서는 간에이 대기근(1641~1643)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김문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2012)
청과 조선의 가뭄 대책
소현세자가 심양에 끌려가 있던 1640년 청나라 또한 기근에 시달렸다. 결국 청은 소현세자 일행에게 곡물 지급을 중단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1645년 청 황실은 조선에 구휼미 20만 석을 요구했다. 가뭄이 극심했던 조선은 이를 10만 석으로 깎아 북경과 심양으로 보냈다.(김문기, 2012)
1695년 을해년 10월 8일 숙종이 말했다. "올해 기근이 거의 경술·신해년보다도 심하다."(1695년 10월 8일 '숙종실록') '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 현종 때 벌어진 기근이다.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00만이었다. 1671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에 곡식을 요구하자(청곡·請穀)고 제안했다. 남인인 영의정 허적은 인조 때 10만 석 강제 지원을 들어 반대했다. 1675년 숙종 1년 남인 윤휴가 다시 청곡을 제안했다. 이번에도 허적이 반대했다. "청나라 은혜는 받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不欲受恩於淸也·불욕수은어청야)." 제안은 또 무산됐다.(1675년 7월 27일 '숙종실록')
을병대기근과 숙종의 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