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反중화파 실학자 홍대용과 주춧돌만 남은 그 집터
실학 북학파 선구 홍대용, 청나라 연경 여행하며 폐쇄적인 중화주의에 반기
"청나라 선비들은 조선의 주자 맹신론을 후련하게 씻어버렸다"
"중화와 오랑캐는 같다" "공자가 조선에 살았다면 조선 춘추를 썼을 것"
혁명적 주장 담은 문집 '담헌서', 사후 156년 지난 1939년 출판… 사상도 전파 안 돼
1834년 일본 장인 구니토모, 망원경으로 일식 관찰
1869년 일식날 새벽 고종 하늘에 "용서를" 제사
![박종인 선임기자](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4/28/2020042800037_0.jpg)
석실서원과 노론 홍대용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을 모신 서원이다.
나라가 안정되고 노론(老論)이 정권을 장악했다.
![](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4/28/2020042800037_1.jpg)
홍대용은 천안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석실서원으로 찾아가 공부했다. 그리고 1765년 34세 때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했다. 1774년 늦은 나이에 훗날 정조가 된 세자를 보필하는 정8품 말단 시직(侍直)이 되었다. 그 사이에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같은 개혁 노론과 불우하되 영민한 서얼들과 교류했다.
홍대용부터 박제가까지, 이 넷은 모두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이다. 서울-경기의 비교적 개방적인 학문 풍토와 청나라 선진 문명 경험이 결합해 이들은 훗날 북학파(北學派)라는 중상주의 실학자들이 되었다. 홍대용은 박지원보다 여섯 살 많았다. '아버지는 항상 조선 사대부들이 이용(利用)과 후생(厚生) 학문을 소홀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홍대용이 평소 간직하고 있던 의견 또한 이와 같았다.'(박지원 아들 박종채, '과정록')
오랑캐 수도에서 각성한 홍대용
![청나라 친구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4/28/2020042800037_2.jpg)
홍대용이 쓴 연경 여행기 '연기(燕記)'에는 홍대용이 겪었던 충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에서는 한 점포 책만 수만 권이나 돼 책 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질 정도였다.(홍대용, '담헌서 외집'9 유리창)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들과 만나 대화를 했고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신부들은 홍대용에게 태양 흑점을 관찰하는 망원경과 나침반과 자명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담헌서 외집'7 유포문답)
그리고 홍대용은 연경에 과거 시험을 보러 온 선비 엄성, 육비, 반정균을 만나 성리학과 양명학과 서양 학문에 대하여 토론했다. 귀국한 홍대용이 기행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 유학자들의 주자 숭봉은 중국인이 따라올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의심되고 논란되는 점에 대해서는 그저 부화뇌동하여 한결같이 엄호하기만 하고 사람 입을 막으려고만 한다. 저들은 이 고루한 습성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담헌서 외집'3 건정록후어(乾淨錄後語)) 오랑캐 수도 연경에서 각성(覺醒)한 것이다.
'의산문답'에 담긴 불온한 사상
그 각성한 선비 홍대용이 쓴 글이 '의산문답(毉山問答·담헌서 내집 4권)'이다. 지구가 돈다는 지전론(地轉論)부터 우주는 끝이 없다는 무한우주론까지, 의산이라는 허구 산에서 허자(虛子·헛공부한 선비)와 실옹(實翁·참된 현자)이 대화를 나눈 우화집이다. 우주론과 세계론을 총동원해 한자 1만2395자로 쓴 이 글 결론은 불온하기 짝이 없다.
'서양이나 중국 할 것 없이 모두 옳은 나라(正界·정계)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어찌 내외의 구별이 있겠는가. 중화와 오랑캐는 같다(自天視之 豈有內外之分哉 華夷一也·자천시지 기유내외지분재 화이일야). 공자가 조선에 와서 살았다면 조선의 춘추(域外春秋·역외춘추)를 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