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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145] 시간의 무늬

colorprom 2020. 4. 18. 15:25


[백영옥의 말과 글] [145] 시간의 무늬


조선일보
                         
  •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0.04.18 03:12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오랜만에 뜨개질이 하고 싶어졌다.
책 한 권을 탈고할 때마다 건초염이 재발할 정도로 손이 아팠던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코로나19 이후, 집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이 늘자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릴 때, 엄마가 떠준 모자나 스웨터를 입고 학교에 다녔었다.
중학교 때는 '가정' 과목이 있었다.
실과 바늘을 들고 박음질, 감침질 등을 배웠고 직접 그린 견본으로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재단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천이나 가죽으로 덧댄 옷을 지금도 좋아한다.
오래 쓰거나 입어서 반질반질해진 가구나 가죽 가방을 보면 그 사람의 단정한 생활 방식에 감탄하게 된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한 후, 많은 것을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었다.
하지만 대학생 때 신춘문예에 다시 떨어지고 이대 후문에서 샀던 찢어진 청바지는 버리지 않았다.
IMF로 온 나라가 '눈물의 폐업 세일'일 때 명동에서 샀던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은 지금도 요가를 할 때 입는다. 이런 물건은 힘든 시간을 함께 지나온 친구 같다.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자주 써서 찻물이 그릇의 틈새로 스민 찻잔을 바라보는 일이 좋아졌다.
집 안에 물건을 들이는 일보다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과 화병 속 튤립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이 좋다.
햇볕 디자인이 가득한 빈집이 멋지게 느껴져 집 안에 빈 공간을 더 만들게 된다.
물건을 치우고 먼지를 닦으면
인테리어든 사람이든 꽉 채우는 것보다 적당히 비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믿게 된다.

며칠 전, 양말에 구멍이 났다.
동네 앞 마트에선 1만원에 양말 여덟 켤레를 살 수 있으니, 꿰매는 일이 꽤 청승처럼 느껴질 법했다.
하지만 5 년 전, 타국으로 이민 가는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 함께 샀던 이 양말에는 애틋한 사연이 있다. 반짇고리에서 빨간색 실을 꺼내 꿰맸더니 구멍을 메운 부분이 뚱뚱한 하트 같아 보였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양말에 이름을 붙였다.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혼자만 아는 건 기억이지.
이건 같이 만든 거니까 추억이고.
추억은 기억이랑 다른 거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17/20200417036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