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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한 베네수엘라 빈민

colorprom 2020. 2. 25. 14:49



[동서남북]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한 베네수엘라 빈민


조선일보
                         
             
입력 2020.02.25 03:16

빈민을 주인으로 치켜세운 베네수엘라 포퓰리즘
국가가 몰락하자 같은 정권에서 노예 처지 돼

김정훈 국제부 차장
김정훈 국제부 차장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도심 한가운데에 45층짜리 유령 건물 '토레 드 다비드'가 서 있다. 190m 높이로만 치면 도시에서 셋째로 높지만, 지금은 콘크리트 골격만 남아 있는 흉물이다. 화려한 유리 외벽 금융센터가 원래 용도였는데 건물주가 파산한 뒤 26년째 이 모양이다. 건물의 침몰사는 한때 남미의 유럽으로 불렸던 제1 원유 매장국 베네수엘라의 추락사와 닮았다.

우고 차베스 정권은 건물 매각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걸핏하면 공장을 국유화하는 베네수엘라 정권에 돈을 넣을 투자자는 국내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비어 있던 건물은 2007년 의외의 '주인'을 만나게 된다. 도시 빈민 200여 가구가 건물을 불법 점거했기 때문이다. 전기도, 배수 시설도,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사람들은 비 피할 지붕을 찾아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한때 5000명이 28층까지 들어찼다. 건물엔 자연스럽게 상점, 이발소, 무면허 치과가 생겼고, 고층을 걸어서 짐을 배달해 주는 일자리도 창출됐다. 차베스 대통령의 열혈 신도인 전직 범죄자는 교회 전도사 행세를 하며 치안을 장악했다.

이 유례없는 수직 슬럼가를 '자생적 공동체의 표본'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맘때쯤 베네수엘라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이상향이었고, 차베스는 반미(反美) 선봉장이었다. 건물에선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아이들이 외벽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이어졌지만 정부는 이들을 퇴거시키지 않았다. 차베스는 빈곤 대중의 혁명을 기치로 정권을 잡았고, 빈민 무상 의료·교육 같은 무상 시리즈로 정권을 유지했다. 당시만 해도 빈민은 베네수엘라의 주인이었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완전히 고꾸라지고 난 다음인 2014년에야 중국 국영은행 컨소시엄이 건물 인수를 타진했다. 한 푼이 아쉬운 베네수엘라 정부는 그제야 카라카스 외곽 빈민촌으로 사람들을 서둘러 강제 이주시켜 건물을 비웠다. 하지만 중국은 건물을 인수하지 않았다. 재작년엔 지진으로 건물 상부 5개 층이 기울었다. 건물 꼭대기는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지난해 건물 1~2층에 교통안전센터가 들어와 이제 건물은 공무원 차지가 됐다. 건물 경비원은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면 30분이나 걸린다"며 위용을 자랑했고, 건물 책임자는 "안전하니까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건물 점거를 다시 시도할 빈민 세력은 없다. 더 이상 빈민들은 베네수엘라의 주인이 아니다. 그들은 정부 식량 보조에 목을 매고 산다. 보조를 받으려면 자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정부 데이터베이스에 포착되는 중국산(産) 칩이 박힌 '애국카드'를 발급받아야 한다. 정부 눈 밖에 나면 당장 먹을 게 끊기는데 건물 점거와 같은 과격한 행동은 생각도 못한다. 퍼주기 끝에 몰락해 버려 국민 7명 중 한 명이 조국을 떠나버린 베네수엘라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반정부를 꿈꾸지 않는다. 지도자를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사람들의 운명을 이렇게 가른다. 차베스는 1999년부터 4번 연속, 이어 그의 아류인 니콜라스 마두로는 2013년 이후 2번 연속 선택을 받았다.

계속 잘못 선택하면 베네수엘라 꼴 나지 말란 법 없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현금 살포 공약이 세금과 빚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와 정기적인 현금 보조금으로 포장해 서서히 중독시킬 뿐이다.

거의 모든 정치인은 물과 같은 존재다. 표 가진 사람이 깔아 주는 길로 흘러간다. 유권자가 원하니까 퍼주는 거다. 베네수엘라의 길로 가지 않으려면 퍼주기를 경계하는 이를 선택해야 한다. 한때 국가의 주인이었던 베네수엘라인들은 10여년 만에 노예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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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24/20200224038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