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무해한 팬덤과 치명적 팬덤

colorprom 2020. 1. 28. 19:04



[동서남북] 무해한 팬덤과 치명적 팬덤


조선일보
                         
             
입력 2020.01.28 03:15

실체와 무관한 가짜 캐릭터들 인기… 정치도 재미 없으면 대중이 외면
예능 인기 공식이 정치로 전이될 때 진실이 가짜에 가려질 수도

신동흔 문화부 차장
신동흔 문화부 차장



'카피추'라는 예명을 쓰는 음악인 캐릭터가 최근 인기다.

표절곡을 마구 불러대면서 원조라고 우기는데,

두 달 전 올린 유튜브 세 편 누적 조회 수가 1500만에 육박하면서

연일 TV·라디오에 불려다니는 유명 인사가 됐다.

혹시 'MBC 출신 개그맨 추대엽 아니냐'고 했다가는, "에이, 재미없게…" 같은 핀잔만 돌아온다.


작년에 뜬 '펭수'도 마찬가지다.

EBS 어린이 프로그램용으로 만든 키 2m 넘는 펭귄 인형이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광고를 찍는 연예인이 됐다. 탈바가지 속 연기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대중은 '실체적 진실'엔 관심 없이 허구적 캐릭터를 소비하고 있다.

일부 기자가 '펭수는 ○○로 추정된다'는 기사를 썼다가 욕만 먹었다.

실체와 무관한 캐릭터가 인기를 누리는 것은 최근 대중문화에 나타난 현상이다.

방송인 유재석은 '유산슬'이라는 부(副)캐릭터를 만들어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들은 수많은 '좋아요'를 날려주는 '추종자'(follower)로 팬덤을 이룬다.

이들 세계에서 '노잼'(no재미)은 죄악시된다.

소셜미디어에 기반한 펭수카피추의 인기 비결을 정치인 팬덤에 대입해볼 수도 있다.

미디어에서 나타난 현상은 종종 다른 분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펭수카피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취향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이나 조국 전(前) 법무부 장관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사실 취향'을 만들어

스토리를 소비하고 있다.

예컨대 '펭수가 연예인 꿈을 이루려 남극에서 건너와 EBS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다'거나,

'카피추는 음악만 생각하며 산속에서 50년 동안 자연인으로 살았다'는 식의 주인공 스토리(영웅 서사) 말이다. 이는 순전한 허구지만 대중에게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주고 현실을 풍자하기도 한다.

정치인들 스토리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fact)을 다룬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문 대통령이나 조 전 장관을 추종하는 팬들은 요즘 거대 권력인 검찰에 맞서 싸우는 영웅 서사를 만들고 있다. 전 장관은 최근 트위터에 "장관 재직 시 검찰 수사에 어떠한 개입도 항변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했지만, 이제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나 자신을 방어할 것"이라고 썼다.

자기는 일개 시민으로, 검찰은 이를 괴롭히는 '거악(巨惡)'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에 전 장관이 청와대 재직 시절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감찰을 중단시켰다거나,

당시 청와대가 대통령 절친의 당선을 위해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했다는 '실체적 진실'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현실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청와대가 거악에 맞선 약자(弱者)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는 팬덤을 이용한 현실 왜곡이다.

최근의 거짓 뉴스 연구에선

'정치인의 거짓말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새롭다'(바비 더피, '팩트의 감각')는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

정치인들의 허언(虛言)은 사실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

대중이 어느 순간부터 이를 쉽게 용인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과 정치인이 소셜미디어로 직접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이

자신들의 취임식 참석자가 오바마 때보다 많았다고 짓말하면서 '대안적 사실'이라 우겼던 것처럼

전 세계 곳곳에서 '탈(脫)진실 정치'가 발견된다.

문화 현상으로서 허구적 캐릭터들은 현실을 풍자하고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긍정적 효과를 갖지만, 정치인들자신의 '실체적 진실'을 숨기는 수단으로 이를 이용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핵(核)노잼'인데,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인기가 건재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27/20200127013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