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성장, 창조와 파괴의 갈림길에서 필요한 것은? (김규나, 조선일보)

colorprom 2020. 1. 8. 17:08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41]

성장, 창조와 파괴의 갈림길에서 필요한 것은?


조선일보
                          
  • 김규나 소설가
         
입력 2020.01.08 03:12

김규나 소설가
김규나 소설가



"그럼 나는, 나라고 네 엄마를 사랑하는 줄 아니?" 참다못한 르픽씨가 불쑥 내뱉었다.

이 말에 홍당무는 눈을 들어 아빠를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얼굴, 텁수룩한 수염,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 부끄러운 듯 수염 속에 숨어버린 입,

주름진 이마. 홍당무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비밀스러운 기쁨과 꼭 움켜쥔 아빠의 손, 이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쥘 르나르 '홍당무' 중에서.


빨간 머리카락과 주근깨투성이 얼굴 때문에 홍당무 소리를 듣는 소년은 더럽고 영악스럽고 난폭해 보인다.

"무슨 죄가 많아 저런 애를 낳았을까" 하며 한탄하지만

씻기지도 않고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궂은일만 시키며 못살게 구는 건 홍당무의 엄마다.


술래잡기를 할 때는 일부러 잡혀주길 좋아하고 말타기 놀이 할 때는 말이 되길 좋아하는 아이,

이따금 근사한 표현을 쏟아내서 친구들에게 시인 같다는 탄성을 듣는 홍당무가 바라는 건

엄마의 사랑, 그리고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이다.

1894년 쥘 르나르가 발표한 '홍당무'는 너무 가까워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다고,

햇빛 한 줌을 보려고 삐뚤삐뚤 몸을 비틀며 자라난 못생긴 소나무처럼

오늘도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쥘 르나르 '홍당무'

아내의 양육 방식에서 구해내지는 못하지만 아버지는 마음 깊이 홍당무를 사랑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이는 꼭 한 번, 엄마 때문에 죽고 싶다고, 엄마랑 떨어져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뜻밖에도 이 무능한 아버지는 엄마 때문에 자신도 힘들다고 속을 털어놓는다.


만약 홍당무가 자라서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아버지와 함께한 이 짧은 순간,

세상에 나와 똑 같은 이유로 나와 똑같은 고통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 덕분이었을 것이다.

성장은 혼돈의 시간이다.

혼돈, 즉 카오스는 인생을 창조할 수도,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다.


갈림길에서 필요한 건 나도 겪어봤지만 그까짓 거 별거 아니었다는 '과거의 공감'이 아니라

나도 지금 너와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말해주는 단 한 사람, '현재의 내 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7/20200107039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