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

[일본][북송 60주년]北送 재일교포 9만3000명, 그 후 60년

colorprom 2019. 12. 13. 15:42



    



"북한의 인권유린 심각… 日, 재일교포 귀환 위해 노력해야"


조선일보
                         
             
입력 2019.12.13 03:01

北送 재일교포 탈북자 기자회견

'재일 조선인 북송의 비극 60년 기자회견'이 12일 도쿄의 일본 국회 중의원 회관에서 열렸다.
오는 14일 9만3000명의 재일교포 북송사업 시작 60년을 맞아 열린 행사다.
일본 민주당 정권에서 문부상을 지낸 나카가와 마사하루 의원 소개로 일본 국회에서의 회견이 성사됐다.

1960년 여덟 살에 북송됐다가 2009년 탈북한 이태경 북송재일교포협회 회장은
"지금도 1만5000명가량의 북송 재일교포들이 목숨을 이어가며 날마다 간절히 자유 귀향을 꿈꾸고 있다"며
"노동당 일본 지부로서 당시 유괴를 저지른 조총련 해산은 시대적 과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북송 1세대 재일교포 탈북자들이 12일 일본 도쿄중의원 제1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북송 1세대 재일교포 탈북자들이
12일 일본 도쿄중의원 제1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하원 특파원
김충식씨는 "1961년 7월 조총련의 속임수에 넘어가
50년 동안 독재체제에서 들을 권리, 말할 권리, 볼 권리를 빼앗긴 후 더는 참을 수 없어서 2011년에 탈북했다" 고 자신을 소개했다. 김씨는
"1968년에 북한 군대에 입대한 후, 상부의 지시로 재일교포들을 모집해서
정찰국 산하에 유사시 일본의 도시를 습격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서 활동했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가한 재일교포 탈북자 중 유일한 여성인 박서연씨는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다.
2006년에 탈북한 그는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조총련의 잘못으로 북한에서 다 죽어가고 있다.
(일본 사회는) 이들의 귀환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변 안전 문제로 선글라스를 쓰고 회견에 나온 기노시타 기미카쓰씨는
"북한에서 탈출해서 일본에 돌아와보니 조총련이 여전히 도쿄 한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숱한 사람을 북한으로 보낸 조총련이 지금도 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북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핵, 미사일보다 인권유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가자들은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진상 규명, 북한 당국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및 피해보상,
북송 재일교포의 신속한 귀국을 요구하는 발표문을 채택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13/2019121300024.html


"청진항 접근하니 먼저 북송된 선배가 '내리지마, 돌아가' 소리쳐"


조선일보
                         
             
입력 2019.12.02 03:00

[재일교포 북송 60년]


- 59북송 후 탈북한 재일교포


"북송선 타기 전날 적십자사 여성 '가겠느냐' 1분간 형식적 질문
도착한 북한 청진항 온통 잿빛사람들 '속은 것 아니냐' 웅성"

"북한에 갈거냐고 다시 묻는다면 9만여명 모두 안가겠다고 할 것"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7)씨는 59년 전 북송선청진항 부두에 접안할 무렵
선착장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학교 선배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도착했던 그 선배는
배에 타고 있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북한 군인들이 못 알아듣도록 일본어로 "내리지 말라"고 외쳤다.

지난달 29일, 59년 전 북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은 가와사키 에이코씨.
지난달 29, 59년 전 북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은 가와사키 에이코씨. /이하원 특파원
북송 재일교포 가와사키씨는 1960년 고3 때 북송선을 타고 청진으로 들어갔다가
2000년대 초반 탈북일본에 정착했다.
오는 14일 '재일교포 귀환사업'이 시작된 지 60년을 앞두고 지난달 29일 니가타항을 방문한 그는
악몽처럼 남아 있는 과거를 회상했다.

가와사키씨는 배가 청진항에 접근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청진항 일대가 온통 잿빛이었고 높은 빌딩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환영 인파 속 사람들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거나 양말을 신은 사람이 드물었다.
'지상 천국'이라던 선전과는 딴판이었다.
배에서 내린 재일교포들이 "속은 것 아니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집단 합숙소에 들어간 가와사키씨와 재일교포들은 첫날 저녁부터 먹을 것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했다.
생지옥 생활의 시작이었다.

가와사키씨는 원래 자신이 태어난 일본을 떠나 북한에 가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4·19가 발생하자 생각을 바꿨다.
조총련"한국이승만 체제가 곧 붕괴되고 사회주의 통일이 될 텐데 미리 북한에 가서 이를 준비하자"
고 선동하는 데 넘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북한행을 말렸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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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5월 재일교포를 태우고 북한으로 갈 선박이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
·일 양측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3000여명의 재일교포를 북송했다. /조선일보DB
"59년 전 북송선이 떠날 때는 굉장한 분위기였다.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 취주악단이 나와서 계속 쿵작거렸다. 지상낙원에 간다는 들뜬 분위기였다.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나와서 열성적으로 환송했다."
가와사키씨 등을 태운 북송선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의 인도를 받아서 출항했다.
배가 일본 영해를 벗어날 때 일본 함정에서 "이제 공해로 들어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했다고
기억했다.

2박3일간 운항했던 북송선에서 북한 관리들로부터 처음 받은 명령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모두 바다에 버리라는 명령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일본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가와사키씨는 그때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했다.
"왜 먹는 음식을 일본 식품이라고 버리라고 하는 걸까.
그러면 '메이드 인 재팬'인 재일교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북한으로부터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청진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본의 가족들이 북한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은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소학교 4학년인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 만나자는 내용만 계속 써서 보냈다.
절대 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부모는 딸이 '지옥에서 보낸 편지'의 의미를 깨닫고 북한행을 단념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던 것을 지금도 아쉬워했다.
"북송선을 타기 전날 국제적십자사의 곱게 생긴 스위스 출신 여성이 나를 심사했다.
'본인 의사로 가느냐'는 형식적인 질문이 전부였다. 1분도 채 안 걸렸다.
그때 제대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니가타항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말했다.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 9만명에게 시간을 돌려서 다시 물어본다면
단 한 명도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가와사키씨는 1987년 북한에서 결혼해 1남4녀를 낳았다.
남편이 사망하고 1990년대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탈북을 결심해
2000년대 초반 딸 하나를 데리고 사선(死線)을 건넜다.
가족들이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는 탓에 자신의 한국 이름과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못한다고 했다.

2004년 일본에 정착한 그는 2007년 '일본인'이 됐다.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은 북송사업 피해자를 돕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일본 국적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북한의 위협을 받거나 위해를 당하게 되면 일본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귀환 사업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열심히 나서라는 뜻도 있다."

가와사키씨는 오는 13일 탈북했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재일교포 10여명과 함께 다시 니가타항을 방문한다.
그날 9만여명을 사지로 몰아넣은 북한 정권을 규탄하고 일본 정부에는 책임 있는 해결을 요구할 계획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02/2019120200248.html

[태평로] 北送 재일교포 9만3000명, 그 후 60년


조선일보
                         

입력 2019.11.27 03:15

1959년부터 25년간의 북송사업, 北·日 합작 국가범죄
위안부와 징용공에 분노하면서 북송 교포 문제 왜 침묵하는가

정권현 논설위원
정권현 논설위원



북한 김일성이 환갑을 맞은 1972년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 준비한 선물 꾸러미에는 '인간 200명'이 포함돼 있었다.

조총련 산하 조선대학교 남녀 학생 200명을 환갑 축하 대표단으로 북한에 보낸 것이다.


북한행을 원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교원들이 나서서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지도자가 되라"며 등을 떠밀었다.

리스트에 올라간 200명은 '인신공양'이나 다름없었다.

재일교포들의 돈을 뜯어내고 함부로 언행을 못하도록 막기 위한 '인질'이기도 했다.


결국 아무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누가 이들의 삶을 기억해줄까.

조선대학교에서 23년간 부(副)학장을 지낸 박용곤(92)씨가 2007년 일본 NHK방송에 출연해 폭로하면서

이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졌다.

"참회한다. 생지옥으로 제자들을 보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을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북송사업.
이후 1984년까지 25년간 180차례에 걸쳐 9만3000여명'지상의 낙원'을 약속받고 일본을 떠났다.
대부분 남한 출신이어서 북한에는 혈연도 지인도 없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일본에서의 민족 차별을 뛰어넘는 계급 차별인권침해였다.
'불온 분자' '일제 간첩' 등으로 몰려 탄압을 받고 상당수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
1990년대의 대기근 때는 더 혹독한 차별과 감시를 받으며 굶주림 속에서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60년, 재일민단 중앙본부는 지난 13일 '북송 6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북송은 '사업'이 아니라 '사건'이며, 북한조총련에 의한 범죄"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납치 문제와 마찬가지로 북송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달라고 호소했다.


북송 시작 당시 북한 6·25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사회 최하층민인 재일교포에 대한 치안 부담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서로 손을 끌고 등을 밀었다.


일본인들은 김일성의 북한이 생지옥인 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은 비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에는 일본 정부의 거짓과 기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일본 정부가 북송을 결정할 당시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다.

문서에 따르면 기시 총리는 "남조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했다. '북송 사업'에 인도주의라는 포장지를 씌운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당시 자민당 의원은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의 대표위원 자격으로 북송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

일본의 좌파 지식인과 모든 언론이 맞장구를 쳤다.


첫 북송선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가 끊어지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도

일본 정부는 오히려 북한 당국에 북송 규모를 일주일에 1000명에서 1500명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재일교포 북송은 냉전시대 자유 진영에서 공산 진영으로 이민족을 추방한 유일한 경우다.

'인종 청소'나 다름없는 국가 범죄라는 지적도 있다.


해방 전 일본군위안부징용공 문제에 분노하면서,

전후에 벌어진 재일교포 9만3000명 북송에 대해선 왜 침묵하는가.

대한민국은 국가적 수치의 기억을 덮어버렸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반드시 따지고자 한다면 재일교포 북송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요구할 일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세계 최악의 독재자를 극진하게 모시기 위해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 청년 2명을 인신공양 하듯이 강제 송환하는 집단이 권력을 깔고 앉아 있는데,

그런 것을 기대하기란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26/20191126032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