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핀셋 규제

colorprom 2019. 11. 20. 16:45


[데스크에서] 그 '핀셋' 놓으시오


조선일보
                         

입력 2019.11.20 03:13

김은정 경제부 차장
김은정 경제부 차장


자율학습 시간, 교실을 순시하던 선생님은 꼭 이런 말씀을 남기고 가시곤 했다.
"일어서서 돌아다니거나 떠드는 놈 한 놈만 나와봐. 이 반 전부 집에 한 시간씩 늦게 갈 줄 알아."
체육 시간도 마찬가지. 팔 벌려 뛰기에서 마지막 구호 생략을 잊은 사람이 나오면
반드시 모두가 엎드려뻗치든 운동장을 돌든 벌을 받아야만 했다.

학창 시절 겪었던 이런 불합리가 뜻밖에 2020년을 앞둔 금융시장에 등장했다.
대규모 원금 손실 사태를 낳은 DLF(파생결합펀드) 사후 대책으로
금융위·금감원이 지난주 내놓은 '개선 방안'이 딱 이런 식이다.

일단 내년부터 전국 은행 지점에선
ELS(주가연계증권)·DLS(파생연계증권) 같은 파생상품을 사실상 못 팔게 됐다.

올 초까지도 문제의 DLS를 팔다가 국채 금리 하락 위험을 감지하고 서둘러 판매를 중단한 은행,
내부 상품선정위원회에서 해당 상품이 위험할 것 같아 처음부터 소비자에게 팔지 않기로 결정한 은행이
사실 더 많다.
이런 내부 통제 기능이 작동하지 않은 은행에서만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열심히 팔아치웠다.
그런데도 벌은 모두가 받게 됐다.
만만찮은 역풍이 불고 있다.

ELS 같은 상품에 투자해 국민이 가져간 이자가 연간 4조원가량 된다.

위험 손실을 감수한 만큼 연 4% 정도 수익률이 나온 덕분이다.

이런 ELS·DLS를 신탁 형태로 우산을 씌워 팔도록 허용한 게 10년이 넘었는데

사태가 커지자 당국은 다시 뒷걸음쳤다.


"원금 보장형 상품만 팔면 되지 않느냐"는 게 당국 논리인데,

덜 위험하게 설계될수록 당연히 약정 금리도 낮아질 수밖에 없으니,

이런 상품은 고객이 찾을 이유가 없다.

이 밖에도 원금 비보장형 상품을 파는 직원·지점·창구를 아예 구분하고,

고령 투자자 기준을 70세 이상에서 만 65세 이상으로 낮추는 규제 등도 줄줄이 나왔다.

"이런 게 핀셋 규제"라고 당국은 자평하는데,

소비자와 금융사들은 "혁신 금융 외치던 그들 맞나" 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규제는 공무원의 본능이라지만, 지금은 새로운 규제 하나를 더 만들어낼 때가 아니다.

기존 방침과 기존 역할을 각자 제대로 하기만 했어도 DLF 난리는 안 벌어졌을 것이다.


한 해 35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쓰면서 금융시장을 똑바로 관리감독하라고 있는 금융감독원

제대로 현장 관리감독을 했다면,

동양 사태 이후 강화된 판매 지침을 일부 은행이 제대로만 따랐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란 얘기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 논의를 진지하게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등이 현행법 체계와 상충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자유롭게 풀어주되 문제가 생기면 본보기로 큰 벌을 주는 방식이

시장도 키우면서 국민 자산에 근본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언제까지 핀셋 들고 설칠 건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19/20191119037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