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여자의 적이 여자라고???

colorprom 2019. 11. 6. 15:41



[일사일언] 78년생 김지영


조선일보
                         
  •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입력 2019.11.06 03:01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1997년 개강 첫날. 사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출근 인파에 떠밀려 덩달아 나도 뛰기 시작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내리고 타려는 사람들의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순간, 어랏! 몸이 두둥실 떠오른다.
앞뒤 좌우로 밀착된 사람들의 힘으로 그야말로 공중 부양, 그대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설마, 온몸의 근육이 뻣뻣해진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
아, 어떻게 하지. 가슴 앞에 모으고 있던 팔을 간신히 아래로 내려서 손으로 엉덩이를 가려본다.
뒷사람의 손은 집요하게 움직이며 파고들었다.

뒤를 바라보니 50대 중년 남자가 서 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제발 하지 마세요.'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전했지만 남자는 눈을 돌렸다.
'이번 역에서 내려야겠구나.' 다시 몸을 비트는데 옆에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 엉덩이가 빨래판이야! 어딜 만져!" 갑자기 아주머니가 소리를 치시는 게 아닌가.
"아저씨, 나랑 같이 내려요. 신고해야지 안 되겠네!"
지하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아주머니에게 쏟아진 그때,
문이 열리고 내 뒤의 남자가 나를 옆으로 밀며 허겁지겁 내린다.
"저런 인간은 아주 혼을 내야 하는데 도망가네. 괜찮아요?"

칼럼 관련 일러스트

2007년 겨울, 큰 프로젝트가 끝나고 함께 일했던 십여 명과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손이 집요하게 허벅지 위를 지나갈 때도 나는 순간 망설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망신을 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조용히 자리를 옮길까.


핸드백을 들고 일어나려는 그 순간,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40대 선배 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밀어내고 남자 옆자리에 앉는다.

"큰따님이 이번에 대학 입학했다면서요. 노심초사 걱정 많으시겠어요."


순간 멋쩍어하던 남자의 얼굴, 상 밑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선배의 따뜻한 온기.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생각했다.

여자의 적이 여자라고 누가 말했던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6/20191106001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