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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않는 이유

colorprom 2019. 10. 25. 14:44



[카페 2040] 배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않는 이유


조선일보
                         
             
입력 2019.10.25 03:13

배트맨은 '정의의 만화'
조커의 궤설에 맞선 그는 거리의 처형이 아니라 사법 질서 회복을 원했다

정상혁 문화부 기자
정상혁 문화부 기자


별반 정의롭지도 않은 자들이 자꾸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것은 만화 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안타깝기 때문이다. 지난달 모 정당에서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를 출범했다고 한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정의 연맹'쯤으로 해석되는 '저스티스 리그'는 배트맨·수퍼맨·원더우먼 등이 소속된 만화 속 수퍼 히어로 팀이다. 과연 이들이 정의를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정의 수복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배트맨만 봐도 알 수 있다. 1939년 처음 등장해 올해 탄생 80주년을 맞는 만화 속 배트맨은 인간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거의 유일한 수퍼 히어로다. 초능력이 없으므로 금욕과 초인적 단련이 필요하다. 맞아 죽을 짓만 골라 하는 국가 원수(怨讐)일지라도 결코 죽이지 않는다. 이는 기적적인 인내력인데, 그가 원하는 것은 거리의 처형이 아닌 사법 질서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세금 낭비 없이 무료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이 영웅은 그러나 부패한 경찰 당국에 쫓기고, 고담 시민 누구도 그를 위해 촛불을 들지 않는다.

탄생 80주년을 맞은 배트맨 첫 만화책 표지
탄생 80주년을 맞은 배트맨 첫 만화책 표지. /DC코믹스
정의의 시세는 떨어지고, 시(市)에는 준법의 회의론이 득세한다. 악당 조커의 활개다. 1988년 출간된 배트맨 시리즈의 걸작 '킬링 조크'는 조커의 내면을 처음으로 부각해 '나쁜 놈의 탄생 비화'를 설명한다. 조커에 따르면, 정상인과 미치광이는 '아주 끔찍한 하루'(one bad day)로 갈린다. 코미디언을 꿈꾸던 가난뱅이가 돈을 벌기 위해 강도 행각에 가담한 그날, 임신한 아내가 죽고 범죄 현장을 급습한 배트맨에게서 도망치다 화학약품 탱크에 빠지고 부작용으로 얼굴과 정신이 추악하게 변하고….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얻고자 기를 쓰는 것… 알고 보면 전부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개그라는 거지! 넌 왜 그 우스운 면을 몰라보는 거야? 왜 웃질 않느냐고?"

배트맨은 무표정으로 대답한다. "왜냐하면 이미 들었던 얘기니까." 이 정의의 사도가 '저스티스 리그'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는 이 같은 반(反)회의주의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들었을 때도 재밌지 않았으니까." 회의주의자와 맞서며 겪는 무모하고 비효율적인 고단함을 독자가 느끼기 때문이다. 어릴 적 강도의 총에 부모를 잃은 그날 이후 범죄 척결에 뛰어든 배트맨의 '아주 끔찍한 하루'를 알고 있는 이상, 수많은 조커의 자기변명은 궤설에 불과하다.

배트맨은 정의의 만화지만 속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미국 만화가 밥 케인은 수퍼맨의 인기에 고무돼 배트맨을 고안했다. 당시의 배트맨은 수퍼맨의 아류에 가까웠고, 이를 지금의 배트맨으로 가공하고 스토리를 부여한 건 동료 스토리 작가 빌 핑거였으나, 케인은 배트맨의 온전한 주인이 되고자 핑거의 공(功) 대부분을 독식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케인은 오랫동안 배트맨의 아버지로 인정받으며 이익을 누렸으나 핑거는 60세 나이에 가난 속에서 숨을 거뒀다"고 썼다. 세월은 흘러 2005년 핑거는 결국 배트맨의 공동 창작자로 인정받았다. 그해, 업적을 이뤘으나 창작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작가를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빌 핑거 상'(賞)이 생겨났다. 그러니 우리는 정의라는 말에서 '언젠가' '반드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비록 한국의 '저스티스 리그'에 배트맨이 없을지라도.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24/20191024034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