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두 분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은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흥사단만큼 인재들이 모여 민족에 봉사하는 공동체가 없다.
1955년 인촌의 장례식 날 오후였다.
나도 그 행렬을 따라갔다.
운구 행렬이 고려대 교정에서 끝났다.
고려대 교수들이 휴게실에 모여
'선생이 살아 계실 때는 우리가 가장 사랑을 받아 왔는데,
상대적으로 정치성이 짙은 국민장이 되니까 좀 아쉽다'는 얘기를 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모님 얘기도 생각난다.
해방 후 평양에서 남편과 작별하고 그의 유품 머리카락을 안고 서울에 왔을 때 앞날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호소할 곳도 없었다.
그때 인촌이 사람을 보내와 찾아갔다.
인촌은 "얼마나 힘드시냐"고 사모님을 위로하면서 '필요하면 거처할 집이라도 준비하여 드리고 싶다"고 했다. 도와달라는 소리가 입안까지 차 있었는데, 두고 온 선생(남편) 말씀이 생각나
"괜찮습니다. 여러 분이 도와주고 있어서…"라고 거짓말을 하고 떠나왔다는 얘기였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고 나 대신 고생해 달라"던 고당의 간곡한 유언이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친구인 안병욱과 김태길도 그랬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게 한 배후에는 젊은이들과 나라를 위하는 공통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 때문에 50년간 우정을 갖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친구는 도산, 인촌과 같이 인간미가 풍부했다.
직업과 사회적 편견을 벗어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았다.
한번은 서울대에 일이 있어 찾아갔다.
기다리고 있던 김태길 교수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꾸미면서 "난 오늘 김 교수는 못 오는 줄 알았어!"라고 했다. "왜?" 했더니 "바람이 몹시 불어서 도중에 날아간 줄 알았지?"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그러면서 잡은 손이 유달리 따뜻했다.
그 손이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못 만났어…'라고.
안병욱 선생도 친구로서 나에게 유언을 남겼다.
"김 선생은 우리들보다 정신력이 강하니까 우리가 못다 한 일들을 마무리 잘해 줄 거야…."
더 이상 건강이 유지되기 어려움을 예감한 듯했다.
안 선생도 그렇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