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춘천마라톤

colorprom 2019. 10. 10. 14:18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빠지면 끝장이다


조선일보
                         
             
입력 2019.10.10 03:14

마라톤, 출발부터 골인까지 포기할까 고민완주 그 자체가 성취
앞서 뛰던 사람 초코파이 반쯤 먹다 버려'! 차라리 날 주지'
'춘마' 때 풍경 감상은 딱 1, 앞 사람 발꿈치 보며 죽어라 뛸 뿐

한현우 논설위원
한현우 논설위원


안철수씨가 달리기에 관한 책을 냈다고 해서 읽었다.
전 독일 부총리였던 요슈카 피셔의 책 '나는 달린다'를 읽고 나서 달리기를 시작했고
풀코스 마라톤까지 완주했다고 해서 흥미가 일었다.
나 역시 예전에 피셔의 책을 읽고 달리기를 시작해 풀코스 마라톤을 네 번 완주한 경험이 있다.

안씨는 작년부터 여러 차례 10㎞와 하프코스를 뛰었고 올해 첫 풀코스를 완주했는데

그 기록이 3시간46분14초라고 했다. 실로 대단하고 엄청난 성취다.

케냐 선수와 나이지리아 선수가 1·2위를 다투는 마라톤을 떠올리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첫 풀코스에서 '서브 포(sub 4·네 시간 이내 완주)'를 해냈다는 건

30년가량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식당 차린 첫해에 미쉐린 스타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대뜸 기록부터 묻는다.

나의 첫 풀코스 기록은 4시간28분이었는데 열에 아홉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마추어 마라톤의 가장 큰 성취는 완주이며, 기록은 그다음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첫 완주 때 아버지는 "너 참 장하고도 독하다"고 말씀했는데

나는 그 표현이 모든 마라톤 완주자를 정확히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안철수씨도 장하고 독한 사람인 것 같다.

아마도 안씨의 마라톤은 어떤 좌절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달리기는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마라톤 완주에는 훨씬 더 큰 동기가 필요하다.

아마추어 마라토너 중에 암 환자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많은 이유다.

어찌해볼 수 없는 좌절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려는 강렬한 욕구가 사람을 마라톤으로 이끈다.

돈·학벌·사회적 지위 다 소용없다.

오로지 맨몸뚱이를 단련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 중 하나가 마라톤 완주다.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빠지면 끝장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좌절은 인간 내면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감정이다.
피셔 역시 이혼과 정치적 실패가 겹친 데다가 너무 뚱뚱해져 축구를 잘할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한 뒤
달리기에 입문했다.
초선 의원 시절 그는 청바지를 입고 등원할 만큼 패기 넘치던 젊은이였다.
중견 정치인이 된 뒤로는 스트레스를 와인과 음식으로 풀었다.
술에 취해 스트레스를 잊고 나면 다시 좌절이 찾아왔다.
그는 날씬해지려고 달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패기를 되찾고 싶어 달렸다.

10월 말에 열리는 춘천마라톤은 춘천 의암호를 한 바퀴 도는 아름다운 코스로 유명하다.
"춘마에서 아름다운 춘천의 가을을 만끽하라"고들 하지만
내가 춘마를 완주하면서 가을 풍경을 본 시간은 다 합쳐도 1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은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보며 거리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할 뿐이다.

마라톤을 떠올릴 때 가장 선명한 장면은
앞서 뛰던 어떤 사람이 반쯤 먹은 초코파이를 길가에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걸 버리다니! 차라리 나를 주지, 하고 속으로 외쳤었다.
첫 완주 때 나는 30대 초반이었는데 무수한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참가자가 나를 추월해 갔다.
달리기가 좋아서 마라톤을 하는 게 아니다.
달리고 난 뒤의 환희를 맛보려면 달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마라톤을 준비하는 동안 매일 10㎞를 뛰고 주말이면 20~30㎞씩 뛰었으나
40㎞ 넘게 달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지다.
20㎞ 중반부터 몸의 온 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고
30㎞가 넘으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을 몽둥이로 맞는 느낌이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아픈데 어떤 구간에서는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저절로 달려진다고들 말하는데 그게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달리기의 무아지경 아닐까 한다.

마라톤은 출발부터 골인까지 오로지 고통과 후회로 가득 차 포기할까 말까 번민하는 스포츠다.
그것을 이겨내야 완주할 수 있기에 완주 자체를 성취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 제약 회사 임원이 쓴 '달리기의 폐해'라는 에세이가 있다.
그는 '폐해'라는 말로 달리기의 중독성을 예찬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
"달리기를 하면 아무리 먹어도 살이 계속 빠진다.
얼굴도 새카매지니 어머니는 애꿎은 며느리 탓을 한다.
비 오는 날 달리면 미친 사람 취급도 받는다.
정장을 모두 새로 사야 하고 신발장엔 운동화가 가득 찬다.
화장실의 느긋한 즐거움도 사라진다. 모든 게 4초면 끝난다.
이런 폐해를 알고도 달리기를 한다면 모두 당신 책임이다.
빠지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09/20191009022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