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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컷 만화

colorprom 2019. 9. 10. 17:01






[만물상] 네 컷 만화


조선일보
                         
             
입력 2019.09.10 03:17

빈칸 네 개에 기승전결을 담는 네 컷 만화는 일본에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인기지만 주로 신문에서 연재되던 우리나라는 예전만 못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네 컷 만화는 미국의 찰스 슐츠가 그린 '피너츠'다.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가 등장하는 이 만화는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장장 50년간 연재됐다. 전성기엔 세계 3억5000만 독자가 매일 이 만화를 읽었다.

▶한국 네 컷 만화의 시초는 1924년 10월 13일 조선일보에 첫선 보인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다. 창간 이후 반일(反日) 보도로 네 차례 정간당하면서 경영난을 겪던 조선일보가 개발한 만화로, 기획·스토리·그림 작가가 각각 있었던 한국 최초의 기획 만화였다. 그때까지 밭 전(田) 자 모양이던 네 컷 만화를 눈 목(目) 자 형태로 바꾼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어이없는 실수로 웃음을 자아내던 이 만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만물상] 네 컷 만화
▶한국 네 컷 만화는 1955년 등장한 '고바우 영감'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김성환 화백이 동아일보에 그리기 시작한 이 만화는 전쟁 후 고단한 삶에 웃음을 주는 만화였다가 점차 정치·사회 풍자만화로 변신했다. 1958년 1월 23일 자 만화가 가장 유명하다. 똥지게 진 두 사람이 맞은편에서 오는 똥지게꾼에게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 하며 꾸벅 절을 한 뒤 고바우에게 "경무대서 똥 치는 분"이라고 귓속말을 한다. 서슬 퍼렇던 권력을 비꼰 이 만화로 김성환은 연행돼 벌금형을 받았다. '고바우 영감'은 1980년 조선일보로 옮겨 12년간 연재된 뒤 2000년 문화일보에서 45년 연재를 마쳤다.

▶'고바우 영감' 이후 네 컷 만화는 신문이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주요 코너가 됐다. 권력이 기사를 검열하던 시절 만화는 민심을 에둘러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독자들은 만화 주인공의 선문답 같은 대사에서 행간을 찾아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야로씨(오룡)·나대로 선생(이홍우)·왈순아지매(정운경)·두꺼비(안의섭) 등이 대표적 네 컷 만화이다.

▶김성환 화백이 엊그제 노환으로 별세했다. 생전 인터뷰에서 "4 ·19 혁명 땐 이기붕이 '고바우 때문에 나라가 망하니 잡아들이라' 했고, 박통 시절엔 한 달이 멀다 하고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녔으며, 전두환 때는 이민 가라고 압력 넣더라"며 껄껄 웃던 한국 만화 저널리즘의 산증인이었다. 한 올 남은 고바우 머리카락은 평소 곱게 구부러져 있다가 어이없을 때면 꼬불꼬불해진다. 요즘도 연재되고 있다면 매일 꼬불꼬불했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09/2019090902580.html



[발자취] 네 컷 시사만화의 전설'고바우 영감' 잠들다


조선일보
                         
             
입력 2019.09.09 03:00

만화가 김성환 화백 별세조선일보 등 14139회 연재
살아있는 권력 통렬히 풍자기네스북, 등록문화재 올라

한국 시사만화 대명사 '고바우 영감'의 만화가 김성환(87)씨가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바우 영감'은 1950년 육군본부 '사병만화'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1955년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1980년 조선일보 등을 거쳐 2000년까지 총 1만4139회 연재된 국내 최장수 신문 네 컷 시사만화다. 45년이라는 단일 만화 최장 연재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원화(原畵)는 2013년 등록문화재가 됐다.

한국 시사만화 대명사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 2013년 10월 자택에서 인터뷰할 때 모습이다.
한국 시사만화 대명사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
201310월 자택에서 인터뷰할 때 모습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안경 차림에 콧수염과 한 올의 머리카락을 지닌 키 작은 고바우 영감을 빌려, 김 화백은 살아있는 권력을 통렬히 풍자해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시사만화는 기사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민감한 사안을 이심전심 이해시키는 외줄타기의 예술이었다. 1958년 경무대 변소 청소부를 소재로 권력 만능 세태를 풍자한 '경무대 똥통 사건'으로 입건되는 등 필화(筆禍)도 예사였다. 김 화백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시절은 그야말로 면도날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6~78년 삭제·수정된 것만 250편에 이른다. 그러나 펜은 무뎌지지 않았다.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는 "국민이 고바우 영감을 읽으며 작은 저항의 웃음을 지었다"고 평했다. 고바우는 '바위같이 튼튼하라'는 뜻의 옛날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87년 6·29 선언 직후인 7월 1일 조선일보에 실린 ‘고바우 영감’.
1987년 6·29 선언 직후인 7월 1일 조선일보에 실린 ‘고바우 영감’.














가난 탓에 만화의 길로 들어선 김 화백은 1949년 연합신문 '멍텅구리'로 데뷔했다. 이듬해 6·25전쟁이 터졌다. 미처 피란을 못 가 서울 정릉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 고안한 것이 바로 '고바우'였다. 김 화백은 "길에 나가면 의용군에 잡혀가니 다락에 숨어 만화 캐릭터를 100명 이상 그렸는데 그 중 하나가 고바우였다"며 "만화는 어린애들만 보는 걸로 돼 있는데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면 노인들까지 보지 않을까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열아홉 살의 국군 종군 화가로 최전방을 누비며 그가 그린 전쟁 기록화는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최초로 소장한 만화가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

'고바우 영감' 완결 후에도 김 화백은 전시 및 출판 활동을 계속했고, 풍속화에도 매진하는 등 창작열을 불태웠다. '고바우 영감' 마지막 회에 그는 '춘풍(春風)'과 '추우(秋雨)' 네 자를 남겼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너무 연연하지 말자"는 의미였다. 빈소는 경기도 분당제생병원, 발인 11일 7시. (031)781-7628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09/20190909001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