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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의 연필과 자전거 (유슬기 기자, topclass)

colorprom 2019. 8. 19. 18:54



소설가 김훈의 연필과 자전거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문학동네 

            


2006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작가의 방’ 부스가 공개됐다.
이때 눈길을 모은 방 중 하나가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고 쓰인 소설가 ‘김훈의 방’이었다.
육군 기갑부대의 구호라는 이 문장은 벽면에 걸린 소칠판에 분필로 쓰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집필실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한다는 김훈 작가는
“망원경은 소설이라는 태아를 자궁에 들어앉히기 위한 도구인 셈”이라고 말했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돼야 글을 쓸 수 있다.”

2019년 3월 발간된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는 여전한 그의 습관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고 시작한다.
그의 하루는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저문다.

쉰 살에 일산에 이사 와 이제 70이 된 작가는 매일 호수공원의 어느 벤치에 앉아
커진 나무와 사라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

그의 책상 한 켠에는 한의사였던 할아버지가 물려준 저울이 있다.
이 저울 위에는 쓰다가 작아져버린 몽당연필 수십 개가 올려져 있다.
김훈 작가는 모니터에 띄워놓은 흰 바탕에 키보드로 두드리는 방식이 아니라,
작은 원고지 한 칸 한 칸을 연필로 눌러가며 글을 쓴다.
이 작업실에서 매일 한 쪽 반에서 두 쪽가량의 원고지를 채워가려고 한다.
이 원고지에는 썼다 지웠다 한 고민의 흔적뿐 아니라 지우개 가루와 담배 냄새도 배어 있다.


완전한 육체노동, 그 순결한 아날로그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자전거 여행》에서도 들을 수 있다.
소설가 김훈의 또 다른 직함은 ‘자전거 레이서’다.
40대 후반, 후배의 권유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그는 이 자전거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을 누볐다.
그는 자전거의 이름을 ‘풍륜’이라고 지었는데, 풍륜을 탈 때 그의 마음은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한 몸이 된 그와 자전거의 엔진은 오직 그의 심장에 의존한다.
하나의 심장으로 굽이굽이를 달리다 보면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의 내리막”이라는 것,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에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몸의 깨달음은 그에게 다시 글이 되고, 글은 다시 길이 된다.
김훈은 꼰대 소리를 들을 줄 알면서도, ‘몸의 언어’를 잃은 시대가 안타깝다.
“젊은이들이 컴퓨터와 스마트폰만을 보고 살아서 도무지 연장을 쓸 줄 모르는 동물로 퇴화했고,
살아 있는 몸의 건강한 기능을 상실했으며,
인간성의 영역이 쪼그라드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얼마 전, 남한산성을 다녀오는 길에 들른 모란 오일장에서 쇠붙이 연장을 파는 장수가 하는 연설에
그는 삽을 한 자루 사다가 눈을 치웠다.
김훈을 감동시킨 그의 연설은 이랬다.

“아, 니미, 서울 공대를 톱으로 나온 녀석이 못대가리 하나를 못 박고, 닭 모가지를 못 비틀어.
아, 제미, 로스쿨 톱으로 나온 놈들이 펜치를 못 쥐고 도라이버를 못 돌려.
이게 사람이냐, 오랑우탄이냐. 몸이 다 썩은 놈들.”


  • 2019년 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