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피톨리노 언덕과 그라쿠스 형제 농지개혁
![송동훈 문명탐험가](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7/25/2019072500334_0.jpg)
카피톨리노 언덕(Mons Capitolino)을 오르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콜로세움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어 로마제국의 심장이었던 포로 로마노를 가로지른다. 길의 이름은 비아 사크라(Via Sacra). 성스러운 길이란 뜻이다. 로마의 개선식은 이 길을 따라 진행됐다. 연초에 집정관을 비롯한 로마의 최고위 관료들도 이 길을 따라 걸었다. 모두의 목적지는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있는 주피터 신전이다. 그리스의 제우스에 해당하는 주피터는 로마에서도 으뜸 신이었다. 개선장군은 그 앞에서 승리를 고했고, 집정관은 한 해의 행운을 기원했다.
또 다른 길은 반대편 베네치아 광장에서 시작된다. 낮고 넓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에 들어서게 된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광장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 한때 언덕의 주인이었던 주피터 신전이 내뿜던 신성함을 바닥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대신하고 있다. 광장 한가운데는 로마제국의 전성기였던 5현제 시대의 최후를 장식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당당하다. 코르나타 쪽을 제외한 3면은 고풍스러운 궁전이고, 포로 로마노로 이어진 길은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광장의 절정은 해 질 녘이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면 21세기의 로마는 사라지고, 마법처럼 르네상스의 로마가 펼쳐진다. 두 길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다. 한 길은 역사와의 벅찬 동행이고, 다른 길은 천재와의 멋진 만남이니까. 그렇게 도달한 언덕은, 광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렬한 역사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고 미래에도 계속될 이야기. 리더와 개혁에 대한 것이다.
◆로마의 자영농이 무너지다
포에니전쟁이 끝났다(기원전 146년).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카르타고는 항복했고, 불태워졌다.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상대로 이겼을 때부터 예상됐던 결말이었다. 한니발 전쟁을 통해 로마는 지중해 최강의 제국으로 거듭났다.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동지중해의 강국인 마케도니아도 멸망시켰다(기원전 168년).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그해에는 그리스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적(敵)이 없었다. 아니, 없어 보였을 뿐이다. 정말 큰 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밖이 아닌 안에서.
![완만하게 펼쳐진 계단을 올라 그리스 신화의 쌍둥이 신 카스트로(Castro)와 폴룩스(Pollux)의 거대한 동상을 지나면 카피톨리노 언덕에 닿게 된다. 언덕이란 표현이 무색할 만큼 낮고, 광장이라 부르기 어색할 만큼 좁은 공간이지만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강렬한 개혁의 외침이 울려 퍼졌던 곳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실패했고 형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적 교훈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혁할 때 개혁하지 못하면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멸망 아니면 혁명이라는 교훈](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7/25/2019072500334_1.jpg)
◆그라쿠스, 자영농 살리기에 나서다
![그라쿠스 형제 동상](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7/25/2019072500334_2.jpg)
◆농지개혁이 실패하다
![카피톨리노 언덕 지도](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7/25/2019072500334_3.jpg)
농지개혁법안의 골자는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사들인 국유지에 한해 국가가 적당한 가격으로 매입해 경작을 원하는 무산계급에 재분배한다'는 것이었다. 매입 대상도 처음부터 거래가 불법이었던 국유지로 한정했고,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귀족들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일부 유력 귀족이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을 지지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귀족도 많았다. 재산상의 손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라쿠스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미래가 보장된 귀족 청년이 왜 가난한 평민들의 편에 서려 하는 것일까?' 그가 참주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이 커졌다. 수세에 몰린 그라쿠스는 과격해졌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또 다른 호민관을 자리에서 내쫓고, 농지개혁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의 무리수는 정체(政體)와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라쿠스는 멈추지 않았다. 농지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호민관직에 재도전했다. 역시 전례 없던 일이었다. 그라쿠스의 정치적 야망에 대한 원로원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호민관 선거가 실시되던 날, 그라쿠스에게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들은 무장한 채 선거 현장에 나타났다. 양측이 충돌했고,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라쿠스와 그를 지지하던 300여 명의 시민이 죽었다. 신체불가침의 권한을 가진 현직 호민관과 죄 없는 시민들이 주피터 신전이 있는 신성한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살해된 것이다. 법치를 자랑하는 로마에서는 있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그라쿠스의 개혁 의지를 영원히 꺾은 것도 아니었다. 10년 후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가 형의 기치를 이어받아 농지개혁을 다시 추진했다. 기득권 세력은 동생마저 자살로 내몰았다(기원전 121년). 이때도 수많은 시민이 함께 죽었다.
원로원은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시민들의 무덤조차 만들지 못하게 했다. 형제의 어미에게는 상복조차 입지 못하게 했다. 비정했다. 그렇게 로마에서 정치와 법이 사라졌다. 선동과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후부터 로마의 군대는 점차 유력한 장군의 사병으로 전락했고, 군벌 간의 다툼 속에 결국 공화국은 종말을 고했다. 방법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의도의 순수성과 무관하게 자영농을 위한 농지개혁이 반드시 필요했음을 역사는 결과로 증명한 셈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에서 가장 신성했던 이곳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개혁을 외치다 스러져 갔다. 개혁이 필요할 때 개혁하지 못한 사회는 반드시 무너지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긴 채.
[또 다른 개혁가도 카피톨리노 언덕서…]
민중 지지로 권력잡은 리엔초, 민중 손에 비참한 최후 맞아
![리엔초 동상](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7/25/2019072500334_4.jpg)
그라쿠스 형제만이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개혁을 부르짖었던 건 아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코르도나타(Cordonata)'라 불리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왼쪽에 작지만 인상적인 동상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콜라 디 리엔초(Cola Di Rienzo· 1313~1354·사진)다. 그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던 웅변가였고, 정치가였다. 교황이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틈을 이용해 로마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장악한 리엔초는 스스로 고대 로마에서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호민관'에 올랐다. 그는 심지어 정치적으로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과 능력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그가 보인 방자함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결국 리엔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민중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