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너의 경쟁자들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라 (한은형, 조선일보)

colorprom 2019. 7. 19. 15:17



너의 경쟁자들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라


조선일보
                         
  •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19.07.13 03:00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애정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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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쇼타임에서 제작한 미국 드라마 ‘빌리언스’ 시즌4의 한 장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주인공 척 로즈가 마조히스트라고 고백하는 장면,
척의 아버지가 기자회견뒤 건배하는 모습, TV로 중계되는 척로즈의 기자회견,
기자회견을 보러 온 기자들. ‘ 모아니면 도’는 될대로 되라는 우연의 세계가 아니다.
자신을 제대로 활용해 힘껏 살아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자세다./넷플릭스 캡쳐

2019년을 맞으면서 한 출판사로부터 신년 선물을 받았다.
민화풍으로 그려진 호랑이가 있는 와인과 윷판이었다.
호랑이 와인은 아끼다가 한 달 전에 마셨고, 윷판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천일야화' 박스 세트 위에 두었다.
윷이 쌓인 흰 보자기와 흰색인 '천일야화' 박스의 상성(相性)이 좋았기 때문이다.

색의 어울림만 좋았던 건 아니다. 순환하며 반복되는 사이클을 가졌다는 점이 동류다.
그래서 둘을 한데 놓았다. 윷은 거실의 오브제가 되었다. 보자기에 결박된 채 말이다.
그런데 보자기는 종종 꿈틀거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윷판 안에 '모 아니면 도'의 세계가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 나는 지금 '모 아니면 도'의 세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한 것도 없이 벌써 한 해의 반년을 써버린 시점에 말이다.
얼마 전에 본 미국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쇼타임에서 제작한 미드 '빌리언스'. 그중 시즌4의 4화에 대해서.
며칠 전에 반년을 그냥 보내 버렸다는 자책감에서 그 회를 다시 봤다.
그 회차의 제목은 바로 '모 아니면 도.'

'빌리언스'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세상의 돈을 끌어모으려는 억만장자 헤지펀드 이야기다.
그를 추적하는 야심만만한 검사장이 힘껏 싸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좀 심드렁하게 보다가 시즌1이 끝나기 전에 이 드라마에 빠졌다.
심지어 시즌5가 시작되기 전에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레이스 앤드 프랭키' 정도다.)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신들이 있고, 처음부터 봐야 그 신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 아니면 도'에도 그런 신이 나온다.

주인공인 척 로즈의 사퇴 기자회견 장면.
투표를 몇 시간 앞둔 시점, 로즈가 사퇴하는 줄 알고 기자들이 모였다.
로즈는 준비해온 문서를 꺼내다 집어넣고 이렇게 말한다.
나를 믿어달라고 이 자리에 선 게 아니다, 날 믿어줄 수 있는지 여쭙겠다,
심히 두렵다, 저란 인간의 진실을 알게 될까 봐.
이렇게 말해서 한껏 기대감을 고조시킨 후 말하는 본론은 이것이다.
"저는 사도마조히즘을 즐깁니다. 결박, 지배, 전부 말입니다. 가면, 속박, 밧줄, 불까지."

회견장의 기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생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멍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야기한 혼란에 희열을 느끼며 로즈는 또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마조히스트라고, 성적 희열을 느끼려면 손발을 묶인 채로 맞고 꼬집히고 채찍질 당하고 발로 차이거나 온갖 고문을 받아야 한다고.

모두가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이 기자회견을 볼 때 만면 가득 미소를 짓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
찰스 로즈, 바로 척 로즈의 아버지다.
척의 설계자이자 척의 적수이기도 한 남자.
아버지의 부 덕분에 아들은 뉴욕 어퍼 이스트의 삶을 누려왔지만
가정 위에 폭군처럼 존재하려는 아버지에 대한 반대급부로 마조히스트가 되었다.
아버지처럼 격 떨어지는 방식으로 군림하는 건,
문학을 사랑하고 고서를 모으는 섬세한 소년의 결에 맞지 않았던 거다.
동시에 세상을 지배하려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아들은
강력한 권력 의지를 지닌 뉴욕 남부 지검 검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척이 출마한 선거는 뉴욕 주 법무장관 선거였다.
(미국에서는 법무장관을 주별로 선출한다는 것, 또 임명직이 아니라 선출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적이 척의 약점, 그러니까 성적으로 평범하지 않다는 걸 폭로하려는 찰나에
이렇게 기자회견을 열고 고백을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아들을 설계했다.
세상에 대한 정력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칠십 후반에서 팔십 초반으로 보이는 아버지,
그는 사퇴하려는 아들에게 이렇게 영감을 준다.

얘야, 너의 경쟁자들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라, 살아남아라, 어떻게든 버텨라.
그리고 또 이분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모 아니면 도를 위하여,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지."

아버지 로즈의 말씀과 눈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스스로를 제대로 활용하고 힘껏 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 신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온갖 생각을 불러왔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인 '모비 딕'의 한 구절도 떠올랐다.
모비 딕을 맹목적으로 쫓는 에이해브 선장에게 일등 항해사 스타벅이 신성모독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왜 녀석에게 이끌려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하나요? 지옥에라도 가야 하나요?
더 이상 쫓는 건 불경스러운 신성모독이에요.

이 부분이다. 나는 '빌리언스'를 보다 스타벅이 말한 신성모독에 대해 뒤늦게 이해했다.
신에게서 부여받은 우리의 인생과 재능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 낭비하는 것, 바로 그게 신성모독이라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이 있다고 치면,
신을 숭배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인생을 숭배하는 자를 더 귀하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대로 된 신이라면 말이다.

'모 아니면 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스타벅이 말하는 신성모독처럼 말이다.
될 대로 되라는 우연의 세계가 아니다.
힘껏 살아본 후 결과를 기다리는 자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늘 우리 편이 아니고, 종종 우리를 엿 먹이고, 그러면서 우리를 시험하니까.

나는 또 몽테뉴에 대해 생각한다.
여섯 자녀 중 다섯을 잃었고, 남동생은 테니스공에 맞아 죽었고, 아버지는 오랜 투병 끝에 죽었고,
종교 내전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던 시기,
죽음에 지친 몽테뉴는 더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고 느낀다.

그랬던 비관주의자 몽테뉴에게 뭔가가 일어난다.
인생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던 거다.

몽테뉴의 이 말을 정말이지 애정한다.

"날씨가 나쁘고 험악할 때 나는 '시간을 흘려보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날씨가 좋으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럴 때는 시간을 다시 맛보고, 시간에 매달린다. …
'소일한다'나 '시간을 보낸다'는 표현은,
인생은 잘 이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그저 흘려보내거나 달아나게 내버려두는 게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현자들이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척 로즈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승리한다. 뉴욕 주 법무장관이 된다.
또 다른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지만, 어쨌거나 승리는 승리.
로즈 부자는 이렇게 건배한다. "모 아니면 도의 인생을 위하여."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2/20190712018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