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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戰後 일본을 다룬 중국의 전략 (신상목 대표, 조선일보)

colorprom 2019. 7. 19. 14:02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4] 戰後 일본을 다룬 중국의 전략


조선일보
                         
  •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입력 2019.07.19 03:07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45년 8월 15일 장제스(蔣介石)는 수도 충칭(重慶)에서 대일(對日) 항전 승리를 선언하는 연설을 한다.

그는 연설 말미에 일본의 침략으로 2000만 명이 희생되어 복수심에 치를 떠는 국민에게 뜻밖의 당부를 전한다. 중국은 일본 군벌을 적으로 삼았을 뿐 인민을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일본인에게 노예적 굴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중국 국민을 설득한 것이다.

나아가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며,

폭력으로 폭력을 보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때의 관대한 전후 처리 방침은 훗날 '이덕보원(以德報怨·덕으로 원수를 갚음)' 연설로 널리 알려진다.

1949년 대륙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 정권은 국민당과 경쟁이라도 하듯 한술 더 떴다.

공산당 지도부는 옌안(延安) 시절부터

'죄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있을 뿐 일본 인민에게는 죄가 없다'는 논리로

일본군의 전의(戰意)를 내부에서 해체하는 심리전을 항일 전략으로 삼던 터였다.

공산당 관할 전범 재판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진 일본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군국주의자·인민 구별론'은 1972년 국교 정상화에도 적용된다.

저우언라이일본 인민에게 부담을 지우는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고,

중국은 수교 성명에서 공식적으로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국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하였다.

중국의 관용일본에 역사 망각의 면죄부를 주는 선심도, 공짜도 아니었다.

'마음의 빚'을 떠안은 일본

1979년부터 40년 동안 경제협력사업(ODA)으로 중국에 무려 3조6500억엔을 제공해야 했다.

중국은 이를 종잣돈 삼아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 굴기(崛起)를 성취했다.

중국의 관대한 전쟁 책임 추궁은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채 일본의 부채의식을 최대한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였던 것이다.


한때 한국도 누렸던 그 외교 자산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8/2019071803410.html



최원혁(altkdlft****)2019.07.1913:34:26신고
일본의 동북아 침공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공도 없었을 것이다.
만주군벌 장작림을 폭사시킴으로 그의 아들 장학량이 서안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을 서안에 가두고
국공합작을 종용해서 공산당 토벌이 먼저라는 장개석을 일본군 토벌에 앞장서게 한것이다..
그후 항일전쟁에서 최대 피해를 가장 앞장선 국민군이 보고 결국 장개석이 본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그 최대 피해본 장본인이 덕으로서 원수를 갚았으니 일본으로서는 고마워 할 수 뿐이 없다.
모택동은 일본군 아니었으면 중공을 못세워을 테니 당연히 일본이 고맙고..
그런데 한국은 독립시켜준 미국을 미워하고 사죄하는 일본을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다고 받아주지 않고하니 오늘날에 문제가 생긴것이다.
방법은 진실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를 배워야 한다.
새로운 역사관이 생겨야 양국의 발전과 동북아의 평화가 이룩된다.
유제인(je****)2019.07.1911:41:04신고
중국은 빨리털어내고 시작하자이고! 한국은 끝까지 물고늘어지다!
우매한 지도자가 우매한 국민 만든다!
박정식(pj****)2019.07.1911:21:36신고
모든 그릇은 그 크기가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사람 마음속에 담겨 있는 그릇의 크기가 있지 않을까요 .
성형국(hgsung97****)2019.07.1910:57:21신고
1965년 한일협정... 어렵지만 이로 인해 자금을 융통하고 (미국이 좀더 무상원조했으면 좋았겠지만
월남전등 미국도 자기코가 석자라서) 국운을 일으킨건 훗날의 후회로 돌이킬순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좀더 힘있고 IMF (그때 있었나)나 세계은행을 통해 자금을 융통할수 있었다면
지금의 이런 분란도 없겠지만, 그땐 그게 옳았고,
중국의 논리는 대국의 가치와 자본주의 자금의 유입이 공산,사회주의 이념과 반하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한국이 강제징용과 위안부를 지속적으로 사죄와 배상 논리로 가는건
일본으로선 이미 한일협정과 90년대 김대중 전대통령시절의 사죄로 끝났다고 생각하기에
그 접점은 없으며 남아 있는건 국내 정치가의 정치적인 친일파 색출이라는 반민특위같은
시대 오류적인 이용만 남아있는것같다.
역사의 첫단추는 1945년이후 반민특위 시절의 청산 - 할수도 없는
많은 사람이 일본의 부역자인 상황-이 요원한걸 지금에 와서 그걸 이념적으로 이용해서 득을 보려는 문제인 정권의 어설픔이 슬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8/20190718034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