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7.06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오래전 일기를 읽다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큰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일에서 온 교수 부부가 아버지를 잠시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는데 시간이 어떠시냐"는 전화였다.
남편은 독일인이고 부인은 한국 사람인데 대구 K대학에 초빙 교수로 와 있었다.
연세대 영빈관을 겸한 알렌관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년 전후의 교수였다.
정년 전후의 교수였다.
남편은 내 아들과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부인과 마주앉게 되었다.
말수가 적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내가 묻는 말의 대답을 통해 그 교수의 지난 일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 때 서독 정부의 요청으로 근로자로 갔던 간호보조원 중 한 사람이다.
박정희 정부 때 서독 정부의 요청으로 근로자로 갔던 간호보조원 중 한 사람이다.
서독에서 임기를 마친 동료들은 대부분 귀국했으나 자기는 그곳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많은 어려움을 치르면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학위 논문이 통과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장년이 되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동안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을 전후해 대구에 와 머물렀고 임기를 끝내면서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년을 전후해 대구에 와 머물렀고 임기를 끝내면서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특별한 이유나 용건은 없었다.
자기네들이 20대에 독일에 있을 때 내가 쓴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으면서
향수심을 달랠 길이 없어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회고였다.
독일이 제2의 고향이 되기는 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한국 생각이 간절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말없이 선물을 건네주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가벼운 목도리와 넥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없이 선물을 건네주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가벼운 목도리와 넥타이라고 했다.
내가 "감사하지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누군가에게 드리고 싶었는데 선생님 생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남편과 함께 현관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선물을 열어봤더니 고급스러운 독일제 명품이었다.
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선물을 남겼을까.
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선물을 남겼을까.
한국에서 자라 40여년을 외국에 머물면서 쌓인 향수심이었을 것이다.
청춘에 한국을 떠날 때도 즐거운 선택은 아니었다. 조국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교수 생활을 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하니까 독일에 남았고 독일 남성과 결혼을 했다.
그 세월이 길어질수록 고국에 대한 감정은 깊어져 갔다.
늙으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독일로 떠나야 한다.
늙으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독일로 떠나야 한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고 한국 남성과 결혼
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그래서 가지고 왔던 선물을 나에게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선배인 C교수는 90이 넘어 아들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되었다.
내 선배인 C교수는 90이 넘어 아들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되었다.
4·19 묘역을 한 번 더 찾아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
4·19 때 교수 데모를 주도한 애국자였다.
나도 그 선배 교수를 보내면서 눈물을 닦았다. 얼마나 사랑했던 조국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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