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7.03 03:01 | 수정 2019.07.03 05:03
[171] 그 많던 경희궁 건물은 어디로 갔을까
기찻길 옆 청나라 약방
서대문에 다리 하나가 있었다. 구름다리라고도 했고 무지개다리, 홍교(虹橋)라고도 했다. 대략 현 한국씨티은행에서 경희궁 앞 흥화문까지 난 다리였다. 다리 아래에는 전철이 지나갔다.
청나라 사람 양성기(楊聖麒)는 그 다리 옆에 살았다. 1908년 10월 원래 살던 집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옆에는 같은 양씨 성을 가진 가족이 세 집 있었다. 양성기는 청국 의사인지라, 그때 신문에 이렇게 광고를 한다.
'본인이 서대문 구름다리[雲橋·운교] 동편에 살다가 지금 서쪽으로 이주했는데, 본인을 찾아오시는 점잖은 분들은 중화약국 생생당(生生堂)으로 왕림하시오.'(1908년 10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서대문에 다리 하나가 있었다. 구름다리라고도 했고 무지개다리, 홍교(虹橋)라고도 했다. 대략 현 한국씨티은행에서 경희궁 앞 흥화문까지 난 다리였다. 다리 아래에는 전철이 지나갔다.
청나라 사람 양성기(楊聖麒)는 그 다리 옆에 살았다. 1908년 10월 원래 살던 집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옆에는 같은 양씨 성을 가진 가족이 세 집 있었다. 양성기는 청국 의사인지라, 그때 신문에 이렇게 광고를 한다.
'본인이 서대문 구름다리[雲橋·운교] 동편에 살다가 지금 서쪽으로 이주했는데, 본인을 찾아오시는 점잖은 분들은 중화약국 생생당(生生堂)으로 왕림하시오.'(1908년 10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아무나 걷는 다리가 아니었다.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이 황궁 경운궁(덕수궁)에서 고개 건너 경희궁 행차용으로 만든 황제의 다리였다. 다리가 세워진 때는 1902년 10월이다. 콜레라와 홍수와 메뚜기 떼가 제국을 휩쓸던 1902년 서대문에 세워진 다리 이야기.
대한제국의 위용
1897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때 이미 고종에게는 제국을 향한 꿈이 있었다. 러시아공사관 생활 닷새째에 고종은 "경운궁과 경복궁 수리 이후 환궁을 결정한다"고 선언하고 그해 8월 궁내부와 탁지부에 경운궁 수리를 맡겼다.(1896년 2월 16일 등'고종실록') 그리고 환궁 이후 수리는 수리가 아니라 중건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수리 중인 황궁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1902년 경운궁 중건이 완료됐다.
2년 뒤인 1904년 2월 29일 함녕전 온돌에서 불이 나 궁궐이 전소됐다. 고종은 "곤궁하지만 반드시 중건하라"고 명했다.(1904년 2월 29일 '승정원일기') '경운궁중건도감'에 따르면 재중건 공사는 소요 기간 2년에 비용은 795만2764냥4전, 신화폐로 160만원가량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세입예산 1421만원의 11%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연구')
막대한 돈을 쓴 이유가 있었다. 위용, 황제국의 위용을 위해서다. 청나라에 압박당하고 일본에 치이고 있는 조선을 황제국으로 격상시키고, 만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려는 계획의 일환이 황궁 건설과 대규모 이벤트 실시였다. 그 가운데에는 칭경 40주년 기념행사가 포함돼 있었다. 1863년 조선 26대 왕으로 등극하고 40년이 되는 1902년을 국제적인 황제국 인정의 해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벌인 일 가운데 하나가 경희궁 국제 '관병식(觀兵式)' 계획이었다. 만국 귀빈을 모셔놓고 대한제국 군대의 위용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경복궁 중건과 경희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경희궁 소개란은 이러하다.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얼핏 보면 멀쩡한 경희궁이 일본에 의해 훼손돼 폐허가 됐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식민지가 되기 전 경희궁은 이미 폐허였다.
대한제국의 위용
1897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때 이미 고종에게는 제국을 향한 꿈이 있었다. 러시아공사관 생활 닷새째에 고종은 "경운궁과 경복궁 수리 이후 환궁을 결정한다"고 선언하고 그해 8월 궁내부와 탁지부에 경운궁 수리를 맡겼다.(1896년 2월 16일 등'고종실록') 그리고 환궁 이후 수리는 수리가 아니라 중건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수리 중인 황궁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1902년 경운궁 중건이 완료됐다.
2년 뒤인 1904년 2월 29일 함녕전 온돌에서 불이 나 궁궐이 전소됐다. 고종은 "곤궁하지만 반드시 중건하라"고 명했다.(1904년 2월 29일 '승정원일기') '경운궁중건도감'에 따르면 재중건 공사는 소요 기간 2년에 비용은 795만2764냥4전, 신화폐로 160만원가량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세입예산 1421만원의 11%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연구')
막대한 돈을 쓴 이유가 있었다. 위용, 황제국의 위용을 위해서다. 청나라에 압박당하고 일본에 치이고 있는 조선을 황제국으로 격상시키고, 만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려는 계획의 일환이 황궁 건설과 대규모 이벤트 실시였다. 그 가운데에는 칭경 40주년 기념행사가 포함돼 있었다. 1863년 조선 26대 왕으로 등극하고 40년이 되는 1902년을 국제적인 황제국 인정의 해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벌인 일 가운데 하나가 경희궁 국제 '관병식(觀兵式)' 계획이었다. 만국 귀빈을 모셔놓고 대한제국 군대의 위용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경복궁 중건과 경희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경희궁 소개란은 이러하다.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얼핏 보면 멀쩡한 경희궁이 일본에 의해 훼손돼 폐허가 됐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식민지가 되기 전 경희궁은 이미 폐허였다.
1865년~1868년 경복궁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영건일기'에 따르면 1865년 8월 22일 '서궐 전각 중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당을 남겼고 나머지는 모두 철거해왔다. 목재가 대부분 썩어 좋은 것을 취해 사용했고, 바닥에 깐 박석들을 뽑아 광화문 앞에 사용했다.' 중건이 시작된 날이 그해 4월 2일이니,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계획을 세울 때부터 경희궁 철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궁이 아니라 재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궁터는 관용 전답으로 분배됐다.(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
경희궁 터는 1883년 뽕나무밭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경희궁을 '뽕나무궁궐'이라 불렀다. 당시 한성에 체류 중이던 외국인들도 '뽕나무궁(Mulberry Palace)'이라 했다.(왕립아시아학회, 'Korea Review' 1902년 10월호) 고종이 경희궁을 관병식 장소로 사용하려 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땅만 다지면 연병장이 확보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전각도 수리를 하면 의전(儀典)에 활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1899년 6월 1일 고종은 당시 최고 국빈인 독일 하인리히 친왕 방한 때 군사 1000명을 동원해 터를 고르고 관병식을 거행했다. 문제는 황제가 사는 경운궁과 경희궁이 너무 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온 답이 다리였다.
황제가 걷는 구름다리
1902년 8월 16일 고종은 경희궁 전각 수리를 명했다.(1902년 8월 16일 '고종실록') 떨어져나간 숭정전 문짝도 그때 다시 달았다. 8월 23일 다리 공사도 시작됐다.(1902년 8월 23일 '황성신문') 두 달 만인 그해 10월 다리가 완공됐다.
경희궁 터는 1883년 뽕나무밭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경희궁을 '뽕나무궁궐'이라 불렀다. 당시 한성에 체류 중이던 외국인들도 '뽕나무궁(Mulberry Palace)'이라 했다.(왕립아시아학회, 'Korea Review' 1902년 10월호) 고종이 경희궁을 관병식 장소로 사용하려 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땅만 다지면 연병장이 확보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전각도 수리를 하면 의전(儀典)에 활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1899년 6월 1일 고종은 당시 최고 국빈인 독일 하인리히 친왕 방한 때 군사 1000명을 동원해 터를 고르고 관병식을 거행했다. 문제는 황제가 사는 경운궁과 경희궁이 너무 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온 답이 다리였다.
황제가 걷는 구름다리
1902년 8월 16일 고종은 경희궁 전각 수리를 명했다.(1902년 8월 16일 '고종실록') 떨어져나간 숭정전 문짝도 그때 다시 달았다. 8월 23일 다리 공사도 시작됐다.(1902년 8월 23일 '황성신문') 두 달 만인 그해 10월 다리가 완공됐다.
문제가 있었다. 다리 남쪽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이 다리가 공사관 구역을 침범했다고 항의한 것이다. 분쟁이 해결되지 않자 러시아공사관은 '통행하지 못하도록 다리 가운데를 철책으로 막아버렸다.'(1902년 11월 12일 '황성신문') 불과 5년 전까지 황제를 자기 영역 안에서 보호해줬던 나라에게 예상 못했던 반응이었다. 그때 평양에서는 고종 내탕금 50만원이 들어간 360칸짜리 풍경궁(豐慶宮)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1902년 5월 14일 '고종실록') 이 또한 러시아와의 친교를 염두에 두고 계획한 궁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리가 완공됐다.
그런데 그 여름, 콜레라가 제국을 덮쳐버렸다. 10월 18일로 예정됐던 기념식은 이듬해로 연기됐다.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던 기념식은 다시 무기 연기됐다. 이번에는 고종 일곱째 아들 이은(李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행사를 가을로 연기하고 각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그 사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 갈등이 증폭되고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졌다. 결국 모든 행사가 취소됐다.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은 100만원이었다.
1903년 가을 한국에 왔던 러시아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다리를 보았다. 세로셰프스키는 강대국에 의해 나라가 분해된 폴란드 출신이었다. 그가 이렇게 썼다. "국고 장부에 공공 이익을 위한 작업에 소요된 돈이라고 비밀스레 표기된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라 하겠다."(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조락해가는 풍경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정동에 공사관을 설치했던 그 어떤 나라도 을사조약이 불법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난파선에서 쥐가 빠져나가듯, 정동에서는 서양 공사관들 철수 러시가 일어났다. 11월 24일 고종이 '큰 형('Elder Brother':1897년 9월 13일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 '한미관계 자료집' Vol 3, p245)'이라고 불렀던 미국이 일착으로 일본 정부에 철수 의사를 밝혔다. (서영희, '대한제국의 보호국화와 외교타운 정동의 종말') 한성에서 가장 화려했던 정동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그런데 그 여름, 콜레라가 제국을 덮쳐버렸다. 10월 18일로 예정됐던 기념식은 이듬해로 연기됐다.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던 기념식은 다시 무기 연기됐다. 이번에는 고종 일곱째 아들 이은(李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행사를 가을로 연기하고 각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그 사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 갈등이 증폭되고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졌다. 결국 모든 행사가 취소됐다.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은 100만원이었다.
1903년 가을 한국에 왔던 러시아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다리를 보았다. 세로셰프스키는 강대국에 의해 나라가 분해된 폴란드 출신이었다. 그가 이렇게 썼다. "국고 장부에 공공 이익을 위한 작업에 소요된 돈이라고 비밀스레 표기된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라 하겠다."(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조락해가는 풍경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정동에 공사관을 설치했던 그 어떤 나라도 을사조약이 불법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난파선에서 쥐가 빠져나가듯, 정동에서는 서양 공사관들 철수 러시가 일어났다. 11월 24일 고종이 '큰 형('Elder Brother':1897년 9월 13일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 '한미관계 자료집' Vol 3, p245)'이라고 불렀던 미국이 일착으로 일본 정부에 철수 의사를 밝혔다. (서영희, '대한제국의 보호국화와 외교타운 정동의 종말') 한성에서 가장 화려했던 정동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이듬해 봄날 텅 빈 황궁 경운궁에서 고종이 학부대신에게 명했다. "책을 끼고 공부하는 선비들을 보기가 드물다고 하니 대단히 안타깝다. 시급히 (성균관) 건물을 수리하고 뛰어난 선비들을 집결시킴으로써 도를 빛나게 하라."(1906년 4월 15일 '고종실록')
도는 빛나지 않았다. 구름다리 아래 서민 마을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1906년 10월 19일 낮술에 취한 군인들이 난동을 부리며 행인들을 검문하는 소동이 빚어졌고 이듬해 2월 운교 서쪽 솜틀집에서 불이 나 열 살짜리 아이가 질식해 죽기도 했다.(1906년 10월 20일, 1907년 2월 3일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28일 서대문 구름다리는 어수선했다. 태황제 고종께서 경희궁터에 있던 황학정에 납시어 활쏘기 시범을 보일 예정이었다. 황학정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용 않던 구름다리를 수리하고 청소하느라 법석을 떨었다.(1908년 3월 28일 '대한매일신보') 다섯 달 뒤 황제만 걸을 수 있는 그 다리에서 지폐 3원과 도장이 든 지갑이 발견됐다.(1908년 8월 13일 '대한매일신보') 황제에 기댔던 구름다리 권위가 그렇게 무너졌다. 이후 다리가 사용됐다는 기록은 없다. 1910년 덕수궁 평면도에도 위치가 표시돼 있으나 철거 시기는 불분명하다.(이왕직(李王職), '덕수궁사', 1938)
의리를 내던지고 국익을 좇았던 열강들은 1년이 못 돼 돌아왔다. 1906년 7월 28일 영국이, 9월 11일에는 미국이 옛날 공사관 자리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동은 다시 붐볐다. 1910년 나라가 사라졌다.
*
1908년 통감부는 황제 칙령을 통해 경복궁과 고종이 사는 덕수궁, 순종의 창덕궁만 황실 재산인 '궁(宮)'으로 분류하고 경희궁은 국유지로 분류했다.(이규철, '통감부 시기 황실시설의 조사와 국유화') 1925년 일본계 사찰 조계사(曹谿寺)가 평양 풍경궁 정문인 황건문(皇建門)을 매입해 절 문으로 재활용했다.(1925년 9월 22일 '대한매일신보') 이듬해 4월 조계사는 1500원을 주고 경희궁 숭정전을 뜯어갔다.(1926년 4월 11일 '대한매일신보') 숭정전은 지금 동국대 구내에 있다. 1928년 조계사는 숙종이 태어났던 회상전도 사들여 부엌으로 사용했다.(총독부, '경성부사' 1권) 동문(東門)인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인 박문사 산문으로 뜯겨갔다가 1988년 재이전됐다. 궁터는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재활용했다. 대한제국은 재활용되지 못했다. 다리 옆 청나라 의사 양성기는 다 보았을 것이다.
도는 빛나지 않았다. 구름다리 아래 서민 마을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1906년 10월 19일 낮술에 취한 군인들이 난동을 부리며 행인들을 검문하는 소동이 빚어졌고 이듬해 2월 운교 서쪽 솜틀집에서 불이 나 열 살짜리 아이가 질식해 죽기도 했다.(1906년 10월 20일, 1907년 2월 3일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28일 서대문 구름다리는 어수선했다. 태황제 고종께서 경희궁터에 있던 황학정에 납시어 활쏘기 시범을 보일 예정이었다. 황학정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용 않던 구름다리를 수리하고 청소하느라 법석을 떨었다.(1908년 3월 28일 '대한매일신보') 다섯 달 뒤 황제만 걸을 수 있는 그 다리에서 지폐 3원과 도장이 든 지갑이 발견됐다.(1908년 8월 13일 '대한매일신보') 황제에 기댔던 구름다리 권위가 그렇게 무너졌다. 이후 다리가 사용됐다는 기록은 없다. 1910년 덕수궁 평면도에도 위치가 표시돼 있으나 철거 시기는 불분명하다.(이왕직(李王職), '덕수궁사', 1938)
의리를 내던지고 국익을 좇았던 열강들은 1년이 못 돼 돌아왔다. 1906년 7월 28일 영국이, 9월 11일에는 미국이 옛날 공사관 자리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동은 다시 붐볐다. 1910년 나라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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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통감부는 황제 칙령을 통해 경복궁과 고종이 사는 덕수궁, 순종의 창덕궁만 황실 재산인 '궁(宮)'으로 분류하고 경희궁은 국유지로 분류했다.(이규철, '통감부 시기 황실시설의 조사와 국유화') 1925년 일본계 사찰 조계사(曹谿寺)가 평양 풍경궁 정문인 황건문(皇建門)을 매입해 절 문으로 재활용했다.(1925년 9월 22일 '대한매일신보') 이듬해 4월 조계사는 1500원을 주고 경희궁 숭정전을 뜯어갔다.(1926년 4월 11일 '대한매일신보') 숭정전은 지금 동국대 구내에 있다. 1928년 조계사는 숙종이 태어났던 회상전도 사들여 부엌으로 사용했다.(총독부, '경성부사' 1권) 동문(東門)인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인 박문사 산문으로 뜯겨갔다가 1988년 재이전됐다. 궁터는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재활용했다. 대한제국은 재활용되지 못했다. 다리 옆 청나라 의사 양성기는 다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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