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6.12 03:01 | 수정 2019.06.12 09:48
[168] 나라를 가지고 놀았던 법부대신 이유인의 일생
금당실은 경상북도 예천에 있다.
사람들은 옆마을 맛질과 합쳐서 '금당 맛질 반(半) 서울'이라고 했다.
온전히 서울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 위세만큼은 서울 절반은 된다는 말이다.
지금도 금당실 한가운데 난 도로 이름은 '반서울로'다.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은 그 금당실에 살았다.
김해에 살다가 와서 아흔아홉 칸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지 5년 만에 양주 목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그리고 6년 뒤 대한제국 법부대신이 되더니
지금으로 치면 검찰총장에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법원장에 도지사까지 두루 지내고 죽었다.
그가 반서울 금당실에 살았다.
그가 반서울 금당실에 살았다.
상경해서는 무당이랑 살았다. 무당 이름은 박창열이다. 사람들은 그 무당을 진령군이라고 불렀다.
그사이 금당실에 울울창창하던 송림(松林)은 반 토막이 되었다.
반서울 예천 금당실에 숨어 있는,
처세는 물론 나라 말아먹는 데 달인이었던 위세롭기 짝이 없던 한 사내 이야기.
무당 진령군과 귀신 부리는 사내
1882년 임오군란 때 도망갔던 고종 왕비 민씨는 피란지 장호원에서 무당 박창렬을 만났다.
무당 진령군과 귀신 부리는 사내
1882년 임오군란 때 도망갔던 고종 왕비 민씨는 피란지 장호원에서 무당 박창렬을 만났다.
오라버니 민겸호가 난군에게 맞아 죽었으니 앞날이 캄캄한 터였다.
예쁜 무당 박창렬은 그녀에게 팔월보름 전 환궁을 예언했고, 실제로 그리되었다.
무당과 동행 환궁한 왕비는 그녀에게 진령군 군호를 내려주고 '언니'라 부르며 궁궐에 함께 살았다.
(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
살다가 입방아에 오르자 진령군은 혜화동에 사당을 지어 나갔다.
2년 뒤 갑신정변 때 고종과 왕비는 이 사당 '북묘(北廟)'로 도망가 목숨을 부지했다.
그때 금당실에 살다 장안에서 떠돌던 이유인이 무당을 찾아와 이리 말했다.
"내가 귀신을 부리고 비바람을 일으키는 귀인이다."
며칠 뒤 깊은 밤, 이유인은 목욕재계를 한 무당과 함께 북한산 심산유곡에 들어가 귀신을 불렀다.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나와라." 푸른 옷을 걸친 귀신이 팔짱 끼고 나왔다.
간이 쪼그라든 진령군 옆에서 또 귀신을 불렀다.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나와라."
네모진 눈에 붉은 눈동자가 툭 튀어나온 10척 장신 귀신이 입에서 피를 뿜으며 튀어나왔다.
무당이 자신보다 신통력이 몇 배인 사내에 대해 고종과 왕비에게 이야기하니,
사내는 1년 만에 양주목사가 되었다.(황현, '매천야록' 1권, '이유인과 진령군')
이후 이유인의 승진력은 비현실적이다.
이후 이유인의 승진력은 비현실적이다.
충북 충주 국망봉에 있는 이유인 묘비에 따르면
1885년 무과에 등과한 이래(정작 무과 합격자 명단인 무과 방목에는 이름이 없다)
파주목사(1888), 양주목사(1889), 한성부판윤(1890), 함남병마절도사(1894)에 이어
마침내 과거 합격 13년, 귀신 놀이 13년 만에 1898년 6월 9일 대한제국 법부대신에 오른 것이다.
이후에도 평리원(대법원) 원장, 경무사(검찰총장), 시종원경(비서실장) 따위 벼슬을 두루 맡았다.
국왕 농락하며 축재한 이유인
벼슬만 노렸다면 탐관(貪官)에 그쳤겠으나, 이유인은 돈을 긁어모은 지저분한 관리(汚吏·오리)였다.
국왕 농락하며 축재한 이유인
벼슬만 노렸다면 탐관(貪官)에 그쳤겠으나, 이유인은 돈을 긁어모은 지저분한 관리(汚吏·오리)였다.
병약한 왕자를 걱정하는 왕비 속을 긁어 돈을 긁었다.
왕실 식재료 담당 부서는 명례궁(明禮宮)이다.
명례궁은 중궁전(中宮殿) 소속이다.
1853~1854년 명례궁 연평균 수입은 3만2954냥이다.
1892~1893년 연평균은 291만6290냥으로,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3.8배 증가했다.
(이영훈,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경제사학' 51호)
1893년 명례궁 지출액은 444만6912냥이었다. 이 가운데 식재료비가 354만2335냥이었다.
이해 왕실에서 지낸 고사와 다례는 모두 29회였다. 연회 또한 37회였다.
1894년 2월에는 220만냥을 들여 왕 생일 축하파티를 벌였다.
1853년 이래 균형을 유지했던 명례궁 수지(收支)는 1884년 이후 급속도로 적자로 돌아서
1893년에는 적자가 자그마치 150만냥이었다.
바로 이 1884년부터 1893년까지가
바로 이 1884년부터 1893년까지가
무당 진령군과 사내 이유인이 왕비 옆에 들러붙어 나라를 가지고 놀던 그 시기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는 계시에
국왕 부부는 꼼짝없이 나랏돈을 제수비로 바쳤다.('매천야록')
봉우리에 바친 돈을 산이 먹었을 리 만무하니, 그 돈 종착역이 어디였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1897년 대한제국시대에도 명례궁 돈은
왕비 민씨 혼전(魂殿)에 올리는 제사상과 황제에게 올리는 잔치에 사용됐다.
돈과 권력을 장악한 그들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이 걸려 있어 수령과 변장들이 그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염치없는 자들이 간혹 자매를 맺기도 하고 혹은 양아들을 맺자고도 하였다.'('매천야록')
1894년 갑오개혁 때 진령군은 거열형을 선고받고 기록에서 사라졌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진령군은 거열형을 선고받고 기록에서 사라졌다.
처형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냥 사라졌다.
이유인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처형과 유배를 주장하는 상소에 고종은 처형은 유배로 낮추고, 유배는 몇 달 만에 특사로 풀어주는
특별사면 조치를 내리곤 했다.
귀에 발린 소리를 하는 이유인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금당실에 지은 구중궁궐
금당실은 임진왜란 전 남사고(南師古)가 십승지 가운데 하나라 부른 곳이다.
금당실에 지은 구중궁궐
금당실은 임진왜란 전 남사고(南師古)가 십승지 가운데 하나라 부른 곳이다.
금당실은 아름답다. 뒤로 오미산이 한가롭고 사방으로 들판이 기름지다.
지금도 옛 돌담이 그대로 남아 관광객을 부른다.
임진왜란 때 권력자 눈 밖에 났던 군인 이순신을 "죄가 없다"며 처벌 불가라 했던 약포 정탁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금당실에서 이유인은 '양주대감'이라 불린다.
그 금당실에서 이유인은 '양주대감'이라 불린다.
1901년 이유인은 경북관찰사로 임명됐다.
1899년 아들 이소영이 예천군수로 임명돼 있었다.
이소영 고향이 예천이니, 이는 연고지를 피해야 하는 조선 법 '상피제(相避制)'에 어긋난다.
특혜인사를 강행한 데는 특수한 목적이 있었을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금당실 아흔아홉 칸 저택 신축이었다.(김봉균, '예천지명 유래', 예천문화원, p360)
집을 지으려면 목재가 있어야 한다.
집을 지으려면 목재가 있어야 한다.
"그 대신이 그 집을 지을 때는 전부 촌으로 배당을 돌렸어. (소나무숲까지) 오십 리가 넘어.
밤새도록 줄을 꼬아서 그 길을 메고 와야 된단 말이지. 그러고 그 뭐 뭐 하나도 안 주고 부역을 시키거던.
올라 갈 때는 고마 그냥 올라갔부러.
이 양주대감이 나라 조회에 드가며는 나라 임금도 용상에 앉았다 일나섰다 앉아야 돼."
(예천 박춘수 증언, '한국구비문학대계', 1984)
품삯 한 푼 안 주고 이유인은 대궐 같은 집을 지었다.
황제와 관련 있는 집인 양 떠들어 왕실 조림지 목재를 베어다 목재로 썼고,
금당실 대대로 내려오는 마을 송림을 베기도 했다.
"혹 뭐 나라 전쟁이 나고 그러먼 피해서 올 적에 법부대신으로 있으니께네 일로 가서 피할라꼬
그래 집을 짓고 큰 기와를 짓다고 그랬었어요."(예천 박춘수 증언)
이유인은 현감인 동생과 함께 '세금 면제'를 조건으로 마을 뒷산을 자기 땅으로 빼앗았다.(예천 박춘수 증언)
예천이 고향인 김봉균은 "지금 송림은 목재로 쓸 만한 장송은 단 한 그루도 없다"고 했다.
마을 길목에 있는 집터는 2500평 정도다.
호화롭고 갑작스러운 죽음
그 천하의 이유인이 죽었다.
호화롭고 갑작스러운 죽음
그 천하의 이유인이 죽었다.
1907년 6월 24일 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이유인은 그해 6월 20일 권한 남용 혐의로 김해에서 검거됐다.
그때 그는 소매 없는 남색 전복을 입고 가슴에는 복숭아색 관대를 차고 머리에는 금관자와 명주갓을 쓰고 있었다.
서울로 압송될 때 밀양에서 잠깐 쉬었는데 다음날 잠자다 죽었다.
아들 소영이 엿새 뒤 왕비 민씨가 숨어 살던 충북 충주 국망봉 높은 곳에 묻었다.
그가 죽고 99칸 집은 죄다 뜯겨 팔려나갔다.
그가 죽고 99칸 집은 죄다 뜯겨 팔려나갔다.
그런데 금당실 마을 군데군데 그 흔적들이 숨어 있다.
집 짓기 전 집터에 있던 집 반송재는 마을 안쪽으로 옮겨 동생 이유직이 살았다. 그 집은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실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정자 병암정은 원래 이유인이 지은 옥소정이었다.
그 정자를 다른 문중이 사서 지금 병암정으로 사용된다.
또 하나 남았다. 반서울이다.
"이양주 대감이 여게 궁궐을, 그래서 반경(半京)이라 그러지요, '반서울'이라꼬,
'금당 맞질 반서울'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아직도."(예천 박연식 증언, '한국구비문학대계', 1984)
[항일지사로 포장된 탐관오리]
2011년 5월 충주 온 산을 뒤져 이유인 무덤을 찾아낸 백촌한국학연구원 김봉균이 말했다.
[항일지사로 포장된 탐관오리]
2011년 5월 충주 온 산을 뒤져 이유인 무덤을 찾아낸 백촌한국학연구원 김봉균이 말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어렵게 자료 다 찾았는데, 논문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그 이유인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항일운동가'라고 적어놓았다.
애국 계몽운동 단체 보안회를 해산시키려 한 이유인(
1904년 7월 23일 '황성신문')을
보안회 부회장으로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섰다고 적었고,
또 다른 애국단체 공진회가 탐관오리 제 1적(賊)으로 붙잡은 이유인(1904년 12월 24일 '윤치호일기')을
'공진회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석방됐다'며 마치 좋은 일 한 투사인 양 기록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양주 대감 이유인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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