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랑했던 사람 아니야"
![김형오 전 국회의장](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6/21/2019062100287_0.jpg)
김 전 의장은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6월 26일) 기념 강연에서
김 전 의장은 백범일지에 나온 김구 선생과 김원봉의 대화도 소개했다.
김 전 의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낭만적으로 역사에 접근하고 역사를 편의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1/2019062100291.html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등에 따르면,
월북 이후 김원봉은 1948년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통해 9월 9일 초대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지금의 우리로 치면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이 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그는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홍명희 등에 이어 7번째 내각 멤버로 적시됐다.
김원봉은 같은 해 11월 미군 주둔을 반대하는 성명을 홍명희 등과 함께 발표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선거지도부'를 구성했는데,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김원봉의 이름을 올렸다.
6·25전쟁 초반 북한이 점령한 대한민국 영토에서 우리 정부의 권력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이식하는 소위 '안정화 작업'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1951년 5월 김일성은 '공화국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를 맡은 김원봉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국내 일각에선 "김원봉이 6·25 전쟁을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52년 3월 김원봉은 북한 정권이 수여한 '노력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에 올랐다.
당시 노동신문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꾼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고 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것이다.
그해 5월에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노동부 장관)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전시(戰時) 노동상은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 등에 관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6·25전쟁 후 김원봉은 1954년 전국열성자대회에 참가하고,
1955년 헝가리 해방 10주년 기념축전 대표단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스스로 월북해 6·25 공훈으로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인물을
우리 대통령이 6·25 순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국군의 뿌리'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8/20190608000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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