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영원한 在野' 장기표씨 (최보식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20. 4. 27. 15:09


    

"내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난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


조선일보
                         
             
입력 2020.04.27 03:15

[최보식이 만난 사람] 또 낙선한 '영원한 재야'… 장기표 선생

"나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 고향 위해 일한 게 없는데 이 나이에 票를 달라고 하면…
오랜 민주화운동으로 고생한 고향 사람 장기표를 돕자는 이들의 성원에 따뜻한 情 느껴"

지난 주말 저녁, 경남 김해에서 막 올라온 '영원한 재야' 장기표(75)씨와 술잔을 나눴다.

그는 또 떨어졌다. 총선 전적만 7전 7패가 됐다.
그전까지 군소 정당이나 신생 정당, 혹은 자신이 만든 정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거대 정당 후보로 나와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미래통합당 공천 작업의 막바지에 김해을(乙) 공천을 받았더군요. 그 도시와 무슨 연고가 있습니까?

"내 고향이죠.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고향 출마는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그전까지 선거에서 떨어져도 다 서울에서 떨어졌지요."

―다들 연고(緣故)를 찾아가는데, 왜 고향 출마를 피했습니까?

"한창나이에는 지역주의를 깨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저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고향을 위해 일한 게 없는데 이 나이에 고향으로 가서 표 달라고 돌아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

―그렇게 느끼면서 왜 김해에 공천 신청을 했습니까?

"저는 미래통합당에 공천 신청을 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나서서 그렇게 하기에는 염치없는 짓이니까요.
공천 작업 막바지인 3월 중순쯤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험지인 김해에 출마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릴 하신다'며 한마디 하고 끊었어요."

―공천 준다는데 왜 그런 단호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출마할 수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은 서울에서 해야지요.
처음으로 털어놓는데, '장기표가 이 나이 되도록 국회의원 한 번 못 했으니
비례대표나 당선될 만한 서울 지역구를 누군가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하는 속마음이 있었지요."

장기표씨는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했다.
장기표씨는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보수정당에서 선생 같은 분이 좌파운동권 세력의 공세를 막아줄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미래통합당이 왜 이런 전략적 판단을 못 했는지 안타깝군요.

"정치판은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나를 당내 경쟁자로 봤을 수 있고, 어쩌면 내게 어디에 출마하라고 말을 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김해을은 어떻게 수락했습니까?

"김형오 위원장이 전화한 지 두 시간쯤 지나 다시 전화해

'김해 험지에서 싸워줄 적당한 인물이 없다'며 설득했어요.

이번에는 예의상 매정하게 끊지 못하고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공관위원인 P의원이 저를 설득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돼 '공천 명단을 곧 발표하니 승낙해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갈 수밖에 없구나 싶어 받아들였어요."

―당초 선생은 사회단체 대표 자격으로 '국민통합신당 창당준비위'에 참여했다가,

공천관리위원회 구성 문제로 갈등을 빚었지요?

"자유한국당에서 이미 꾸려놓은 '김형오 공천관리위'를 통합신당에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김형오는 자기 당에 대해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말하던 김세연 의원을 넣는 등

독단적으로 공관위를 구성했어요.

제가 '김형오에게 모든 권한을 줘 공천 잘못으로 참패하면 그때 가서 한탄한들 뭐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결국 제 말이 맞았잖아요."

김형오 위원장은 소신을 갖고 했다고 하지만, 납득 안 되는 공천이 꽤 있었어요.

총선 패배에 공천 실패도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결국 김형오가 중간에 사퇴했는데, 자기 사람들을 심고 '먹튀'한 모습과 비슷하잖아요.

위성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 대표와 공관위원장도 중간에 그만뒀고, 이미 정해놓은 공천 후보까지 바꾸고…, 선거일이 가까이 오는데도 선거대책위도 제때 출범 못 시켰잖아요.

지구당에 당 공약집도 안 내려왔습니다. 선거 앞두고 이렇게 하는 정당이 과연 공당(公黨)입니까."

―그런 경위야 어떠했든 선생은 당 공천심사를 안 거치고 공천받은 특별 케이스인데?

"김해에 내려와 있으니, 당 사무국에서 '공천 심사 서류는 갖춰야 한다'고 했어요.

공천 서류는 분량이 많고 기입할 게 많아요. 내 사무실 직원이 대략 적어낸 것 같습니다.

공천이 너무 촉박하게 준비 없이 이뤄져 선관위에 마감 날까지 후보 등록을 못 맞출 뻔했어요.

후보 등록 서류에는 범죄 이력 증명서도 첨부해야 하는데,

경찰서에서 이런 서류를 발급받으려면 이틀이 걸립니다. 날짜에 쫓겼어요.

알다시피 제가 시국 전과가 많잖아요."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1971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 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 5·3 인천 사태(1986년), 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1976년 서울 왕십리 중앙시장에 있는 다방에서

차(茶) 두 잔을 놓고 결혼했던 사람이다.

그가 쓴 책에는 '부부가 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오래도록 행복했던 시간으로 간직할 수 있을 만한 오붓한 추억거리를 만들어둬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결혼 41년 만에 처음 부부 동반으로 강원도에 2박 3일 여행 간 얘기를 적었다.

이를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또 선거에 출마한다니까 부인의 반응은요?

"다 늙어 또 한다니 엄청나게 반대하지요."

―이번에는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았으니 당선 확률이 높다고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출마할 때마다 설득해봤지만 효력이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설득하겠다는 걸 단념했어요.

혼자 김해로 내려왔습니다."

―부인께서 선거운동을 안 도왔습니까?

"정식 선거운동 기간에는 내려왔어요. 나이 들어 이렇게 한다는 게 다 창피하지요.

제 스스로도 민망한데, 박지원씨 같은 경우에는 국회의원을 계속 해왔으니까 좀 덜 하겠지만."

본 투표에서 106표 졌는데

―역시 생물학적 나이라는 게 핸디캡이 되지요?

"내 선거운동을 도와줄 운동원들이 처음에는 '우리 후보님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이라고들 했어요.

하지만 며칠 같이 현장에 다니고 나서는 그런 말은 쑥 들어갔어요."

―김해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고 여당 텃밭인데, 내려가니 주민들이 선생을 알아보던가요?

"여당 후보가 이전 선거에서 득표율 60%대 이상으로 이겼던 지역구입니다. 소위 '노무현 타운'입니다.

행정 조직 말단까지 여당이 다 장악하고 있어요.

작년에 최 선생의 인터뷰로 지식인들에게는 내가 많이 알려졌지만,

김해에 내려오니 특히 젊은 사람들은 나를 몰라요.

나에 대해 좀 아는 주민들은 '장 선생님 같은 분이 왜 기호 2번으로 나왔나?'라고 물어요."

장기표씨 선거 유세 사진

―선생이 주사파 운동권과 민노총·전교조 등에 맞서 싸워온 사실을 잘 몰라서 그랬겠군요.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내 정치적 뜻을 이루려면 국회의원이 돼야 하는데

그동안 독자적으로 아무리 주장해도 사람과 돈이 안 붙었다. 그래서 양당 중 하나를 선택했다.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인데,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고,

나라를 망치는 주사파 운동권에 의해 장악돼 있다'고 했어요."

―거대 정당의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해보니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지요?

"그전까지는 총선에 출마해도 국가 정책을 공약했지, 지역 발전 공약이라는 걸 해본 적 없었어요.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내려와 선거공보물을 만들기도 빠듯했어요.

실제로 김해의 지리(地理)도 잘 몰라요.

코로나 사태로 장사가 안 되는 상가를 돌며 후보입네 인사를 하는 게 미안했어요.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을 전혀 부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정권 중간에 치르는 선거는 정권 심판 성격인데, 코로나 사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선거가 됐지요?

"코로나 대응이 세계적으로 평가받자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큰 성과가 됐어요.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절박한데, 통합당은 재난 지원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비쳤어요.

그런 점이 투표에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젊은 직장인이나 지식인들은 정부 여당이 싫어도,

수구 꼴통 꼰대의 이미지가 있는 통합당은 차마 찍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1만1000표 이상 차이로 떨어졌는데?

"본 투표 개표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4만481표 대 4만375표였어요. 106표(0.13%) 졌어요.

그런데 사전투표 개표에서 여당 표가 막 쏟아졌어요.

3만1153표 대 1만9628표로 무려 22.7% 차이나 났어요."

―어떻게 그런일이…. 이게 선거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한낱 특이 현상인지,

일각에서 제기하는 사전투표 조작 의혹과 관련된 것인지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어쨌든 이번 선거에서 무슨 기억이 가장 남습니까?

"나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으로 고생한 고향 사람 장기표를 돕자'며

열렬하게 성원해줬습니다. 그런 따뜻한 정을 느끼면서 내가 김해 출마를 참 잘했구나 싶었어요.

일면식도 없는 타지 분이 내려와 '장기표 선생이 꼭 당선돼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도와줬고요.

선거 전날에는 제 둘째 딸이 지원 유세를 했습니다.

아버지로서 해준 게 없었는데 듣고 있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유튜브에서 딸의 지원 유세 영상을 찾아봤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일생 동안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도망 생활·고문을 당하고도 10억원가량 민주화보상금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 보상금은 일반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민주화운동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정치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신념과 원칙이 낯설지 모릅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무분별한 공공기관이 세금을 축낸다고 공공기관 이사장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술잔을 놓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출마할 일이 안 올 수 있겠지만,

정치로써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내 꿈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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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한 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열 명"


조선일보
                             
             
입력 2019.06.03 03:13 | 수정 2019.06.03 05:12

'영원한 在野' 장기표씨

"사실 나는 데모할 수 있는 대학생이어서 특혜를 받았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다.
농사 안 짓고, 공장에서 일 안 하고, 기업도 안 하고 전부 다 데모만 했으면 나라 안 망했겠나.
사회는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노력이 총화를 이뤄 발전한다."

장기표(74)씨를 만난 것은 열흘 전 '光州와 봉하마을, 누가 불편하게 만드나'라는 필자의 칼럼에
짧게 인용된 위의 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에 관한 한 그 앞에서 명함을 내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1971년),
민청학련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사건(1977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1980년), 5·3인천사태(1986년),
중부지역당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대접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출소 후 동문 모임에 가니 내게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우리는 대학 캠퍼스와 친구가 있는 좋은 환경이어서 데모할 수 있었지,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하는 사람이 아무리 민주화 의지가 있어도 데모할 수 있었겠나.
당시 나를 취조한 수사관에 대해서도 '인간말종' '독재자 후예'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인생이 뒤바뀌었으면 나도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위해 일했을 것이다."

장기표씨는 “나같이 데모만 하는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표씨는 “나같이 데모만 하는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한 '독재자 후예'라는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런 말에 정말 분노했다.
대통령이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국민을 분열시키는 말을 해도 되는가.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안 했다고 다 '친일파'라고 할 수 있나.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장에서 "1980년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광주에 함께 못한 것에 대해
그 시대 한 시민으로서 참 미안하다"며 말을 못 이었다.

"그렇게 마음 아프고 빚진 인생으로 살았다면 왜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은 위선(僞善) 아닌가. 권력 유지를 위한 게 아닌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문 대통령의 진심을 왜 의심하는가?

"1984년 내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조직하려고 전국을 돌았다.
부산에 갔을 때 학생운동 전력이 있다는 문재인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그에게 함께 할 것을 권하자 '이런 일에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강경해서 그 뒤로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런 분이 이제 와서 민주화 운동을 전매특허 낸 것처럼 하기에 과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대학 시절 시위 전력으로 구속된 적 있고 그 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은 사실 아닌가?

"학생 데모를 잠깐 했을 뿐이지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인권 변호사로 포장하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6월 항쟁(1987년) 이후에 민주화되면서 시국 사건과 노동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 사건 몇 건을 돈 받고 맡은 적 있었는지 모르나 인권 변호사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게 있었으면 그가 벌써 밝혔을 텐데 수임 사건 내역에 그런 게 없다."

―장 선생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안 된다'며 기자회견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가?

"그는 애초에 정치할 뜻이 없었고 국정 운영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노빠'의 아바타로 나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나라를 끌고 갈 수 있겠나.
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박근혜에게는 최순실이 한 명이지만 앞으로 문재인에게는 최순실이 열 명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당시 무슨 근거로 '최순실 열 명'을 말했나?

"나는 '운동권 내부 정서'를 잘 알고 있다. 그쪽 동네에선 운동 경력에 밀리면 꼼짝 못하는 법이다.
문재인의 학생 시위 전력은 운동권 프로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에게는 이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운동권의 포로가 된다. 그쪽의 강경 주장에 따라가게 된다.
정부 부처마다 적폐 청산 기구과거사위원회 같은 게 줄줄이 설치된 것도
어느 주장에도 그가 반대를 못 하기 때문이다.
반대하면 제대로 운동도 안 해본 사람으로 볼까 봐 겁내는 것이다."

―과거에는 혹 그런 기분이 있었을지 모르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그것에 지배된다고 보나?

"운동권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런 정서에 지배되는 것이다.
과거 노무현도 이런 운동권 콤플렉스가 있었던 사람이다.
현 정권에서 민주노총에 절절매는 것은 단순히 촛불 집회 때의 부채 의식 때문은 아니다.
'운동권 사쿠라'는 원래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과거에 '청계피복노조'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노동운동을 해왔다.
탄압에 맞서 겨우 키워냈던 노동 조직이 이제는 법 위에 군림한 것처럼 됐다.

"그때는 약자인 노동자의 조직을 만드는 게 옳았다.
이제는 내 개인적으로 광화문에서 최대의 기득권 집단이 된 민노총 규탄 대회를 한 적 있다.
대기업 위주의 민노총 조합원은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3배를 받는 노동 귀족들이다."

최보식 선임기자와 장기표씨
/이태경 기자
―다시 5·18로 돌아가면 장 선생은 당시 무엇을 했나?

"1979년 말 출소한 뒤 김대중씨가 중심이 된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조직국장을 맡았다. 시위 조직 및 배후 조종을 했던 것이다. 이게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나는 3년 반 도망 다녔다.
김영삼 정부에서 특별법이 제정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가 됐다.
보상을 위해 유공자 등록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안 했다.
그 뒤 다른 시국 사건도 재심(再審)을 통해 보상이 이뤄졌지만 나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민주화 보상금을 다 받았으면 몇 억원은 됐을 텐데 왜 신청을 안 했나?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 등은 다 실체가 있었고 당시 실정법을 위반했다.
정권이 바뀌어 재심 법정에서 해석을 달리해 무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행위는 오직 역사 평가에 맡기고 싶었다."

―재심 법정이 일종의 역사적 평가가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잘난 체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보상금을 받기 위한 재심(再審)이어서 탐탁지 않았다."

―그 시절에 희생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운동도 안 하고 수백억씩 해 처먹는 놈들도 있는데, 큰돈도 아니고 몇억 받는 걸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의무로 여겼고
또 입만 벌리면 나라와 민족 운운했지 않나.
그걸 돈으로 보상받으면 우리의 명예는 뭔가.
더욱이 보상금박정희전두환이 주는 돈도 아니고 국민이 낸 돈이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받지 말자'고 말한 적 있었나?

"혼자 잘난 척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입밖에 안 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시절 서울대 교수인 H씨가 교육부 장관이 되자
1980년대 해직 교수 60여명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선정해 각 1억3000만원씩 80여억원을 나눠줬다.
광주와 직접 관련된 사람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1980년 그해가 아니라 1985년, 1986년에 해직된 교수도 있었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미 복직됐고 밀린 봉급을 2억~3억원씩 받았다. 높은 자리에도 많이 갔다.
그렇게 다 받아먹고 또 보상금을 주고받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민주화 운동에 부채 의식이 있어 말을 못 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나쁜 놈들'이라며 분노해 글을 썼다."

―장 선생은 재야(在野)에서는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정치권 진입을 시도한 뒤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0년 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게 시작이었다.
그 동지들은 현실 정치를 깨닫고 대부분 YS 진영으로 들어가 다음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 선생은 따라가지 않았는데.

"과거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을 읽고서
정보화 사회가 새로운 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독자적인 정치 이념을 만들었다.
기존 정당으로는 이를 구현할 수 없었다."

―선거 때마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출마했고 낙선했다. 이 때문에 '창당 전문가'로 조롱받았다.
창당 행적을 보면 같은 이상이나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 정당의 공천 탈락자들과 손잡거나 이념이 다른 신생 정당과 합당하는 식이었다.
그럴 바에는 기존 정당에 들어가는 게 맞지 않았나?

"당을 만들려면 그런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따라온 거지,
당의 코어(핵심)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기존 정당은 우리나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는 해법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정치는 현실과 세력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재오 전 의원이 "이명박 정권 때 장기표에게 지역구 공천과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말하더라. 이 말을 듣고 장 선생을 다시 봤다.
하지만 기존 체제에 들어가 뜻을 구현할 수도 있지 않나?

"과거 김대중 정권에서도 나를 원했다.
한나라당에서도 김문수가 공천심사위원장을 할 때 최상위 순번의 전국구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내 뜻을 구현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는 거지. 나는 기존 정당의 한계를 지적해왔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안 지키면 되겠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2/2019060201761.html



김진산(ji****)모바일에서 작성2019.06.0315:49:50신고
TV조선이나 조선일보가 아니고서는 대한민국 돌아가는 정세를 알수?榴?
이철희(padma****)모바일에서 작성2019.06.0315:49:11신고
국가와 민주화를 위한 희생에 무슨 금전적 보상을 바라나
나라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민주주의가 한걸음 앞으로 내딛어졌으면 그게 보상이지 라는
선생의 말씀에 고개가 숙여진다
얼띠기 생계형 운동권들 완장짓이 부끄럽지않니?
특히 서열에 끼이지도못하고도 숟가락 얹져 국민분열을 일삼는 추악하고도 비열한 문죄앙집단은
자폭하라!
전병락(pol****)2019.06.0315:46:19신고
예전에는 장선생님을 무척이나 싫어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보고 느낀점 이 많습니다.
그때는 나라의 궁핍함때문에 먹고 살려다 보니 불가피한 제재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의 그런 마인드로 국민분열과 정권 유지 차원에서 얕은 수를 쓰는 이 정권은
정말로 빨리 사라져야 할 대상인 겁니다.
젊은 시절과 나이들어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점 그나마 다행이고
어설픈 민주화 운동쟁이 팔푼이들의 잘못 하나하나 파헤쳐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잘 일께워 주시기 바랍니다.
박홍준(db****)2019.06.0315:41:35신고
오일팔 유공자명단 못까는 이유가 있었군
박홍준(db****)2019.06.0315:39:35신고
이 글을 보고 운동권 나부랑이들은 또 뭐라고 변명할까? ㅋㅋㅋ 같잖은 것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2/20190602017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