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5.18 03:00
[아무튼, 주말]
밴드 '양반들' 보컬 전범선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5/17/2019051702223_0.jpg)
"마라탕 먹으러 갈래요?"
스물여덟의 채식주의자는 매운맛을 좋아한다고 했다. 쑥갓, 고수, 팽이버섯, 청경채에 마라 소스를 넣고 채수(菜水)로 푹 끓이면 얼얼하고 저릿한 맛이 일품이라고. 오후 3시라는 애매한 시간에 동네 한량처럼 어슬렁어슬렁 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록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28)이다.
이 '동네 한량'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민족사관고 졸업 후 도미. 미국 다트머스대 졸업.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합격했다가 그만두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미국 역사로 석사. 특목고와 아이비리그에 이어 옥스브릿지라. 21세기형 도장 깨기인가. 지금 직업은 3집까지 펴낸 가수다. 오지랖은 계속된다. 사회과학출판사 '두루미'를 설립했고, 사찰 음식점 '소식'을 만들었으며, 대학가 책방 '풀무질'을 인수했다. 종편의 예능 프로그램 패널로도 이름났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뭔가.
"(웃으며) 문화·예술운동 하는 사람이다. 2014년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최근 '양반들'로 이름을 바꿨다)'을 처음 시작할 땐 그냥 '공부하면서 노는 애'였다. 1집 제목은 '사랑가', 2집은 '혁명가', 3집은 '방랑가'였다. 혁명적인 사랑을 해 보자는 게 2집 주제였는데, 마침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우연히 이 노래가 떠 버렸다. 그때 경험을 계기로 지금 활동들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일단 군대부터 가기로 결심했다. 카투사로 21개월 복무하고 작년에 전역했다. 그러고 나서 밴드, 책방, 식당, 출판사를 모두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민족사관고 시절부터 학업과 음악을 병행했다는데.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고. 이게 모토였다. 사실 공부는 승부욕으로 한 거다. 공부는 그 자체를 '경쟁'이라고 생각했지만 밴드 할 땐 그런 게 없었다. 일종의 해방구였고, 덕분에 작게나마 자유를 누렸다. 음악에서만큼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게 좋았다. "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뮤지션은 힘들지 않나.
"처음엔 자연발생적인,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창조 행위였다. 음반을 세 장을 냈는데 전부 수록곡 9개가 넘는 정규 음반이라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돈을 벌려면 1~2곡짜리 싱글 음반을 내는 게 맞는다. 그래도 '록 밴드는 정규 음반이지!'라는 '가오'였다(웃음). 지금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밴드를 유지해야 하고, 대중이 좋아해야 하고,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도 있고."
그는 '~와 ~들'이라는 작명에서 한국 록의 계보를 읽었다고 했다.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2008년 장기하와 얼굴들, 그리고 2014년 전범선과 양반들. 전통과 계보에 꽂혔다는 이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의 가치관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민족사관고 다닐 땐 말 그대로 '민족사관'을 배웠다. 학부에선 역사를 전공했다. 석사 논문 주제는 미국 혁명사였다. 한복을 입고 SAT(미국 수능)를 준비하던 고교 시절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미합중국에 가야 하고, 미합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대영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학을 계속하면서 '역사'를 파고들었고, 동시에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 고민의 결과가 '양반'인가.
"그렇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좋아했던 사상가들은 올더스 헉슬리, 버트런드 러셀,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이었다. 사상은 급진적이지만 인물은 품위 있고 귀족적인. 그런 부류의 영국 지식인 캐릭터를 동경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한 번도 혁명이나 침략을 겪지 않고,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았다. 그 올곧은 자존감이 부러웠다. 한국에도 지식인을 지칭하는 개념이 있을까 고민해보다가 '양반'이란 단어에 꽂혔다. 양반이 단순히 지배 계급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일방적인 타도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양반들이 남긴 풍류와 품격이 근대 문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내가 동경했던 영국의 뿌리 깊은 지식인들처럼 나 역시 조선 땅에서 품위 있게 문화·예술을 논할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로망을 찾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되나'를 고민했던 시기."
스물여덟의 채식주의자는 매운맛을 좋아한다고 했다. 쑥갓, 고수, 팽이버섯, 청경채에 마라 소스를 넣고 채수(菜水)로 푹 끓이면 얼얼하고 저릿한 맛이 일품이라고. 오후 3시라는 애매한 시간에 동네 한량처럼 어슬렁어슬렁 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록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28)이다.
이 '동네 한량'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민족사관고 졸업 후 도미. 미국 다트머스대 졸업.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합격했다가 그만두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미국 역사로 석사. 특목고와 아이비리그에 이어 옥스브릿지라. 21세기형 도장 깨기인가. 지금 직업은 3집까지 펴낸 가수다. 오지랖은 계속된다. 사회과학출판사 '두루미'를 설립했고, 사찰 음식점 '소식'을 만들었으며, 대학가 책방 '풀무질'을 인수했다. 종편의 예능 프로그램 패널로도 이름났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뭔가.
"(웃으며) 문화·예술운동 하는 사람이다. 2014년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최근 '양반들'로 이름을 바꿨다)'을 처음 시작할 땐 그냥 '공부하면서 노는 애'였다. 1집 제목은 '사랑가', 2집은 '혁명가', 3집은 '방랑가'였다. 혁명적인 사랑을 해 보자는 게 2집 주제였는데, 마침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우연히 이 노래가 떠 버렸다. 그때 경험을 계기로 지금 활동들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일단 군대부터 가기로 결심했다. 카투사로 21개월 복무하고 작년에 전역했다. 그러고 나서 밴드, 책방, 식당, 출판사를 모두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민족사관고 시절부터 학업과 음악을 병행했다는데.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고. 이게 모토였다. 사실 공부는 승부욕으로 한 거다. 공부는 그 자체를 '경쟁'이라고 생각했지만 밴드 할 땐 그런 게 없었다. 일종의 해방구였고, 덕분에 작게나마 자유를 누렸다. 음악에서만큼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게 좋았다. "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뮤지션은 힘들지 않나.
"처음엔 자연발생적인,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창조 행위였다. 음반을 세 장을 냈는데 전부 수록곡 9개가 넘는 정규 음반이라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돈을 벌려면 1~2곡짜리 싱글 음반을 내는 게 맞는다. 그래도 '록 밴드는 정규 음반이지!'라는 '가오'였다(웃음). 지금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밴드를 유지해야 하고, 대중이 좋아해야 하고,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도 있고."
그는 '~와 ~들'이라는 작명에서 한국 록의 계보를 읽었다고 했다.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2008년 장기하와 얼굴들, 그리고 2014년 전범선과 양반들. 전통과 계보에 꽂혔다는 이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의 가치관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민족사관고 다닐 땐 말 그대로 '민족사관'을 배웠다. 학부에선 역사를 전공했다. 석사 논문 주제는 미국 혁명사였다. 한복을 입고 SAT(미국 수능)를 준비하던 고교 시절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미합중국에 가야 하고, 미합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대영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학을 계속하면서 '역사'를 파고들었고, 동시에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 고민의 결과가 '양반'인가.
"그렇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좋아했던 사상가들은 올더스 헉슬리, 버트런드 러셀,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이었다. 사상은 급진적이지만 인물은 품위 있고 귀족적인. 그런 부류의 영국 지식인 캐릭터를 동경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한 번도 혁명이나 침략을 겪지 않고,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았다. 그 올곧은 자존감이 부러웠다. 한국에도 지식인을 지칭하는 개념이 있을까 고민해보다가 '양반'이란 단어에 꽂혔다. 양반이 단순히 지배 계급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일방적인 타도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양반들이 남긴 풍류와 품격이 근대 문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내가 동경했던 영국의 뿌리 깊은 지식인들처럼 나 역시 조선 땅에서 품위 있게 문화·예술을 논할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로망을 찾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되나'를 고민했던 시기."
![공연 중인 전범선.](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5/17/2019051702223_1.jpg)
―대학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입시 코디'를 했다고 들었다. 실제 입시판은 드라마 '스카이캐슬'과 비슷한가.
"드라마는 허구다. 전문직은 그런 호화 저택에 살지 못한다. 재벌가는 그렇게 '빡세게' 공부시키지 않는다. 재벌가 과외도 해보고, 3대째 의사 가문 과외도 해 보고, 다 해봤다. 내가 일했던 학원은 고2~3 학생들 30명의 입시를 총체적으로 책임졌다. 나는 주로 SAT 독해를 가르쳤고. 당시 로스쿨에 합격하고 등록 유예를 한 시기였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여기 학원 일이 사실상 변호사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그들 자녀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냐, 그들 회사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 가르치는 데 시간당 15만원씩 받았고, 브로커 역할을 했던 학원이 그중 3만~10만원을 가져갔다. 풀타임으로 열심히 뛰면 하루에 100만원도 벌 수 있었다. '첫 직장'이었다. 그 경험 덕에 돈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
―어쨌거나 처음 꿈은 변호사였다. 로스쿨을 진학했고.
"엄밀히 말하면 로스쿨에 진학하지 않았다. 합격하고 등록을 유예하면서 진학을 고민하다 취소했다. 로스쿨 입시 자기소개서에는 '국제법을 전공해 동북아 평화 체제를 이룩하고 싶다' '통일이 되는 그날 평양에 록 페스티벌을 만들어 자유의 깃발을 꽂겠다'고 썼다. 그 무렵 대한민국 법무부 인권정책과에서 인턴을 하기도 했다. 정부가 유엔인권이사회에 보내는 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북한이 유엔인권이사회에 보낸 영문 보고서를 역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양국이 서로 '우리 인권 현실이 최고야'라고 주장하며 단점은 덮고 장점을 강조하더라." ―회의가 있었나 보다.
"그때 머리와 수염을 길렀는데, 관련 부처에서 전화가 와 "출근을 하려면 장관님 보시기에 안 좋으니 머리와 수염을 잘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염은 밀고 머리는 단정하게 묶겠다는 절충안으로 겨우 합격했다. 회의를 느꼈다. 인권 현실에 대한 거창한 담론들 말고, 이렇게 피부로 느껴지는 사소한 부분들에서."
―박차고 나왔다는데 아쉽진 않나.
"변호사를 하고 있거나 투자은행, 컨설팅 회사 다니는 선배들 이야길 들어보면 다 비슷하다. 다들 돈 벌어 일찍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결국 지금 일은 목표가 아닌 거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 하고 싶은 걸 나는 지금 하고 있다. 이미 밴드를 만들었고, 3집까지 낸 가수고, 사랑해주는 팬들도 있다. 구태여 돌아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일찍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밴드는 물론 일제강점기 서적을 재출간하는 출판사 사장, 고사 위기의 인문학 서점을 인수한 책방 대표, 동물 해방을 꿈꾸는 사찰 음식점 사장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가장 즐겁다."
최근에는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로 더 익숙한 스쿠터를 중고로 한 대 장만했다. "이 작은 녀석을 타고 국토 횡단을 하는 게 목표예요."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남미 일주를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남은 청춘을 보내고 싶단다. "혁명 전사, 멋있잖아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서른 넘어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불가능하더라도 꿈만은 포기하지 않은 20대 리얼리스트라면 좀 더 지켜봐도 좋지 않을까. 기품 있는 혁명 전사 혹은 혈기 방장 조선 양반이 땀 흘리며 마라탕 그릇을 비웠다.
About 전범선
2010년 민족사관고등학교 졸업
2013년 미국 다트머스 칼리지 졸업
2014년 록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로 데뷔
201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 석사과정 졸업
"드라마는 허구다. 전문직은 그런 호화 저택에 살지 못한다. 재벌가는 그렇게 '빡세게' 공부시키지 않는다. 재벌가 과외도 해보고, 3대째 의사 가문 과외도 해 보고, 다 해봤다. 내가 일했던 학원은 고2~3 학생들 30명의 입시를 총체적으로 책임졌다. 나는 주로 SAT 독해를 가르쳤고. 당시 로스쿨에 합격하고 등록 유예를 한 시기였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여기 학원 일이 사실상 변호사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그들 자녀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냐, 그들 회사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 가르치는 데 시간당 15만원씩 받았고, 브로커 역할을 했던 학원이 그중 3만~10만원을 가져갔다. 풀타임으로 열심히 뛰면 하루에 100만원도 벌 수 있었다. '첫 직장'이었다. 그 경험 덕에 돈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
―어쨌거나 처음 꿈은 변호사였다. 로스쿨을 진학했고.
"엄밀히 말하면 로스쿨에 진학하지 않았다. 합격하고 등록을 유예하면서 진학을 고민하다 취소했다. 로스쿨 입시 자기소개서에는 '국제법을 전공해 동북아 평화 체제를 이룩하고 싶다' '통일이 되는 그날 평양에 록 페스티벌을 만들어 자유의 깃발을 꽂겠다'고 썼다. 그 무렵 대한민국 법무부 인권정책과에서 인턴을 하기도 했다. 정부가 유엔인권이사회에 보내는 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북한이 유엔인권이사회에 보낸 영문 보고서를 역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양국이 서로 '우리 인권 현실이 최고야'라고 주장하며 단점은 덮고 장점을 강조하더라." ―회의가 있었나 보다.
"그때 머리와 수염을 길렀는데, 관련 부처에서 전화가 와 "출근을 하려면 장관님 보시기에 안 좋으니 머리와 수염을 잘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염은 밀고 머리는 단정하게 묶겠다는 절충안으로 겨우 합격했다. 회의를 느꼈다. 인권 현실에 대한 거창한 담론들 말고, 이렇게 피부로 느껴지는 사소한 부분들에서."
―박차고 나왔다는데 아쉽진 않나.
"변호사를 하고 있거나 투자은행, 컨설팅 회사 다니는 선배들 이야길 들어보면 다 비슷하다. 다들 돈 벌어 일찍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결국 지금 일은 목표가 아닌 거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 하고 싶은 걸 나는 지금 하고 있다. 이미 밴드를 만들었고, 3집까지 낸 가수고, 사랑해주는 팬들도 있다. 구태여 돌아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일찍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밴드는 물론 일제강점기 서적을 재출간하는 출판사 사장, 고사 위기의 인문학 서점을 인수한 책방 대표, 동물 해방을 꿈꾸는 사찰 음식점 사장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가장 즐겁다."
최근에는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로 더 익숙한 스쿠터를 중고로 한 대 장만했다. "이 작은 녀석을 타고 국토 횡단을 하는 게 목표예요."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남미 일주를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남은 청춘을 보내고 싶단다. "혁명 전사, 멋있잖아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서른 넘어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불가능하더라도 꿈만은 포기하지 않은 20대 리얼리스트라면 좀 더 지켜봐도 좋지 않을까. 기품 있는 혁명 전사 혹은 혈기 방장 조선 양반이 땀 흘리며 마라탕 그릇을 비웠다.
About 전범선
2010년 민족사관고등학교 졸업
2013년 미국 다트머스 칼리지 졸업
2014년 록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로 데뷔
201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 석사과정 졸업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