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골방의 Nobody냐, 광장의 Somebody냐

colorprom 2019. 5. 4. 16:01



골방의 Nobody, 광장의 Somebody


조선일보
                             
             
입력 2019.05.04 03:00

[아무튼, 주말- 魚友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어수웅·주말뉴스부장


고교 동창과 오랜만에 소주잔을 부딪쳤습니다. 학창 시절 녀석은 순진하고 무대 공포증도 있는 친구였어요. 존재감 약하고 실수도 잦았죠. 지금은 어떠냐고요? 180도 반대입니다. 꼼꼼한 완벽주의자 중소기업 사장님. 세상물정 밝고 무대와 조명도 즐기는. 그런데 한 잔이 한 병이 되면서 흥미로운 고백을 하더군요. 어쩌면 그때 자신을 무시했던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고. 반전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이 힘들다고. 아무도 내게 관심 없던 그때가 더 편했다고.

이번 주 읽은 책 중에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 '여행의 이유'(문학동네刊)가 있습니다. 5월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초록의 계절, 여행의 계절. 소설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인용합니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주지하다시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시대 막론, 길 떠나는 여행자의 상징이기도 하죠. 이 영웅의 모험 중에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와의 사투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골방에 틀어박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광장으로 나오고 싶을 때도 있죠. 오디세우스가 키클롭스를 우연히 만난 게 아닙니다.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외딴 섬의 동굴로 괴물을 찾아가죠. 그리고 외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난공불락 트로이가 누구 덕에 함락되었는지 알아?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게 누군지 알아?"

결과를 우리는 압니다. 열두 명 부하를 차례로 잃고서야 오디세우스는 제정신을 차리죠. 괴물 앞에 바짝 엎드립니다. 그러고는 자신을 '우티스'라고 소개하죠. 그리스어 우티스는 영어로 Nobody. 오디세우스는 최고의 포도주로 키클롭스를 구워삶은 뒤 잠든 괴물의 눈을 찌릅니다. 비명 듣고 달려온 친구 키클롭스들이 누가 너를 찔렀느냐고 물었을 때 이 외눈박이 괴물의 대답은 "Nobody is killing me."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무도 찌른 사람은 없어." 친구 괴물들은 그 말을 듣고 그냥 돌아갑니다. 허영과 인정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숙였을 때 오디세우스는 죽지 않죠.

우리는 늘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위태로운 인생을 질주합니다. 골방이냐 광장이냐. 예외는 없습니다. 소설가건 보통 사람이건. 슬기로운 균형을 꿈꾸는데, 늘 어렵습니다. 호쾌한 5월 되시기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3/201905030210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