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3·1운동] 3·1운동이라는 코끼리 만지기

colorprom 2019. 4. 17. 15:15



[이선민의 아웃룩] 3·1운동이라는 코끼리 만지기


조선일보
                             
             
입력 2019.04.17 03:12

올해 3·1운동 100주년 맞아 지식인들 지적 분투 인상적
3·1운동서 세계 변혁 실마리 찾고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성급함·자의적 해석도 나와

이선민 선임기자
이선민 선임기자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연초부터 관련 논문과 책이 쏟아졌고, 학술대회가 줄을 이었다.
지난 한 세기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3·1운동이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다. 너무 많아서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글 가운데 필자의 눈을 끌었던 몇 편이 있었다.

"3·1운동은 한민족이 현대 문명의 정신세계에 입문하는 계기이자 한국과 미국 사이에 평화와 인도를 추구하는 민간동맹이 본격화되는 기원이었다." 조성환 경기대 교수는 2월 26일 한국자유회의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의 주제 발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3·1운동이 여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과 달리 현대 문명 속에서 국가의 독립과 번영을 이루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개화기 이래 한국을 근대 사회로 바꾸려는 노력을 도왔던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지지했고, 그 뒤에도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렇게 형성된 한·미 민간동맹이 해방 후 한·미 국가동맹의 결속과 지속을 견인했다는 주장은 한·미 관계를 더욱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3·1운동, 누구를이 아니라 무엇을 계승했는지 묻자"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월 25일 이승만 학당이 마련한 학술대회의 발표를 통해 "이제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구를 계승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계승했는가를 묻자"고 제안했다. 누가 끝까지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싸웠는지를 기준으로 인물을 배제하는 것은 독립운동가를 가르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만큼 자유와 자립, 평화와 교류를 추구했던 3·1독립 정신을 계승해 대한민국이 수립된 사실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3월 1일의 뜨거운 열기와 정신보다 이후 '변절' 여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전도된 시각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운 보수 세력의 기원을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기폭제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 일제에 협력해 다소 '때가 탄' 인물들 위주로 찾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상당하다.

한반도에 국한돼 온 3·1운동에 대한 시야를 세계로 넓히자는 주장도 나왔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3월 25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민족주의의 옛 3·1'을 넘어 '보편주의의 새 3·1'로 나아가야 한다고 연설했다. 3·1운동을 항일·독립·민족 운동만이 아니라 민주 공화·세계 시민·보편 평화의 봉우리로 조망하자는 것이다. 100년 전 3·1운동을 보편적 민주 공화와 평화 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해 오늘의 한반도와 세계 변혁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야심 찬 만큼 거친 결론을 내릴 위험도 크다. 3·1운동이 '제국주의/민족주의'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의 대립마저 넘어서려 했다는 분석에서 성급함을 확인하게 된다.

사회과학자 對 역사학자의 시각

해마다 돌아오는 3·1운동을 100주년을 맞아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지적 분투는 인상적이다. 3·1운동이라는 코끼리를 여기저기 만져 보고 나름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은 진지하다. 그러다 보니 코끼리에게 모자를 씌워 놓고 모자가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지식인도 나왔다.

칼럼 관련 그래픽
그래픽=양인성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는 '창작과 비평' 봄호(號)에 실은 글에서 3·1운동을 '촛불 혁명'과 연결해 해석했다. 촛불 항쟁의 저항 방식이 3·1운동에서 기인했고, 양자(兩者)는 민주 공화의 이념을 거리에서 실현했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3·1운동에서 촛불 혁명까지를 연속 사건으로 이해하면 인식 지평이 넓어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3·1운동의 '민주 공화' 목표가 근대적 정치 모델을 추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 극복의 의지도 포함한다는 분석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3·1운동 이후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모색하는 흐름이 강하게 대두했다며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예로 드는 부분에는 실소하게 된다. 자의적 해석이 지나쳐 엉뚱한 설명을 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글들의 공통점은 사회과학자가 현재적 관점에서 3·1운동을 바라본 것이다. 글쓴이의 강한 문제의식이 100년 전에 투영돼 3·1운동이라는 코끼리를 그려냈다. 반면 박찬승 한양대 교수가 펴낸 '1919'라는 저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천착해 온 역사학자의 저술답게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3·1운동의 모습을 그렸다. 이 책에서 3·1운동은 한국인이 근대 민족으로 재탄생하는 결정적 계기로 부각된다. 평민 출신 민족대표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신분과 성별을 넘어 수많은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한국인은 내부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거듭났다. 또 일제에 강제 병합된 후 경제적 어려움과 일상적 차별에 시달리던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그 성과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세계 최초로 국민 각자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공화제를 헌법에 명시했다.

3·1운동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억이 처음 제대로 정리된 것은 50주년을 맞는 1969년이었다. 그때는 '민족중흥(民族中興)'이 고취되던 시대 분위기에 맞게 민족적 관점이 대세였다. 그다음 본격적으로 3·1운동을 논의한 것은 70주년이었던 1989년이었다. 당시는 민중사학이 대두하던 시절이라서 민중적 관점이 강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은 이를 종합해서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더욱 넓고 깊고 원숙한 관점을 만들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작동하는 정권 차원의 '역사 정치'가 3·1운동에도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몇 장의 코끼리 그림만 남기고 끝나는 것 같아서 못내 아쉽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6/2019041603394.html




유성출(yoo****)모바일에서 작성2019.04.1712:14:38신고
삼일운동은 조선 황제의 죽음으로 발발했다.
민족자결주의 때문이 아니다. 볼세비키 혁명 때문도 아니다.
근대적 자유 정신이 아니라 슬픔, 분노, 한맺힘, 고통, 절망의 감정이 삼일운동의 원동력이었다.
나는 역사를 이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직시한다.
삼일운동을 민주 공화혁명이라고 이념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대한독립만세! '의 뜻은 대한제국 만세를 뜻하지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사학자 중에 가장 정직한 사람을 독사 머리처럼 발로 짓밟아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6/20190416033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