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기업에 전범 딱지 붙이기, '검은 머리 매국' 운운 보며
진정한 극일 꿈꿨던 한국 문학 산증인 떠올라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 2018) 서울대 명예교수의 유족이 재산 30억원을 기부했다.
자식도 없이 읽고 썼던 삶. 유족이라고 해 봐야 팔순 넘은 아내 가정혜 여사가 전부다.
먼저 간 남편의 뜻을 헤아려 부부가 평생 모은 돈을 새로 짓는 국립한국문학관을 위해 내놓은 것이다.
몇 년 전 선생이 정정하던 시절 우표 붙은 그의 육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구구절절은 괄호 속에 넣고, 200자 원고지에 손으로 눌러 적은 내용 중 이런 대목이 있다.
'강아지라도 길러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소.'
편지 며칠 전 기자는 그의 신간 서평을 지면에 썼다. 책 제목은 '내가 읽고 만난 일본'.
사실 새 책이 나왔기로서니 '김윤식의 신간' 그 자체는 뉴스가 아니다.
김 교수는 동사 '읽다'와 '쓰다'의 주어로 불릴 만큼 한국 지성사에서 유례 드문 다산(多産)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 리스트. 심지어 쓴 책의 머리말만 따로 묶어 책을 낼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낯설었다.
실증적 연구나 엄정한 비평을 위주로 한 다른 책들과 달리
어떤 비감(悲感)까지도 여과 없이 드러낸 1인칭 주어의 고백록이었다.
일종의 '사상적 자서전'이라고나 할까.
800쪽 넘는 '벽돌' 두께의 책은 1970년의 어떤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그해 34세였던 서울대의 젊은 조교수 김윤식은
하버드 옌칭 연구비를 지원받아 일본 도쿄대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주제는 '한국 근대 문학에 미친 일본 문학의 영향'.
국립대학의 젊은 교수는 고백한다.
그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민지 사관의 극복이었다고.
하지만 곧 열패감에 빠졌다고 했다.
아무리 이광수의 서재와 염상섭의 생활기록부를 도쿄와 교토 땅에서 뒤지고 다니더라도
결국 이들은 일본 근대 문학의 아들이더라는 것.
상심에 빠진 한국 학자를 구원한 사람 중 한 명이 일본 문학평론가 에토 준(1933~1999)이었다.
이 나라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 연구로
일본 제1의 문예비평가라는 최상급 경칭을 얻은 학자.
그리고 김윤식은 확인한다.
거칠게 압축하면 천하의 소세키 역시 평지 돌출은 아니더라는 것.
일본 문부성 해외 장학생 1호였던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의 세례를 받았고,
에토 준 역시 그 기원을 찾아 소세키가 유학했던 빅토리아조의 런던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일본은 그렇게 근대를 이식했고, 한국 역시 그렇게 근대를 시작했다.
이후 김윤식의 지적 여정은 열패감을 극복하고
한국 문학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겠다는 노력과 실천으로 요약된다.
200권의 리스트는 그 결과인 셈이다.
엊그제의 기부가 계기였지만 몇 년 전 선생의 편지와 고백이 떠오른 이유는
결국 최근 논란이 됐던 '관제 민족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기도의회의 일본 제품 전범 스티커 붙이기와
민주당 대변인의 한국인 블룸버그 기자에 대한 '검은 머리 매국' 운운….
일회성 카타르시스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부정적 딱지 붙이기는 결국 열등감 혹은 사대주의를 비추는 무의식의 거울일 따름이다.
다시 편지의 '강아지'로 돌아온다.
에토 준과의 만남에서 김윤식은 "글쓰기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일본 학자의 선문답 같은 대답은 "강아지라도 길러보라."
역시 자식 없이 평생을 썼지만 강아지 한 마리는 옆에 뒀던 세 살 위 선배의 유머이자 충고였을까.
김윤식은 그 당부도 마다한 채 평생을 읽고 쓰며 한국 문학의 증인으로 남았다.
선생다운 삶이자 극일(克日)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