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영화]〈500일의 썸머〉

colorprom 2019. 3. 20. 14:44



당신의 인생을 바꿀 영화 〈18〉 500일의 썸머

500일간의 사랑, 그 잊음의 기록

            


세상의 모든 영화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담론이고, 몇몇 장르영화를 잠깐 접어둔다면, 인간을 다룬 영화는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허다한 대중가요가 그러하듯 나이 스물을 넘긴 이라면 어느 누구도 사랑에 대해 한마디쯤 거들지 못할 사람이 없다.

사랑에 관한 명언 또한 차고 넘친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바보가 되고 사랑을 시로 하소연하기 때문에 또 바보가 된다.”(16세기 영국 시인 존 던), “즐거움과 사랑은 위대한 행동의 날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세계 철학사에 남을 업적을 이룬 학자 중 ‘사랑’이란 개념을 철학적 담론으로 승화시켜 놓은 이가 있으니 바로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1980)이다. 프롬은 34개 언어로 번역돼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1956)에서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기보다는 하나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사실 〈사랑의 기술〉은 프롬의 대표작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1976)에서 전개된 그의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가 강조하는 ‘존재적’ 실존 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있으며,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존재적 실존 양식을 위해선 독자성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내포한 사랑이야말로 허다한 사랑의 양태 가운데 가장 이상적 모델이라 부를 만할 것인데, 필자 눈에 그 일단(一端)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감독 마크 웹, 2009)다. 500일간의 여름날쯤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제목의 ‘Summer’는 여주인공 이름이다. 즉 썸머와 사귄 500일간의 기록인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관이 고스란히

영화는 이런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500일의 썸머〉가 로맨틱 코미디임을 보여주는 장치다.

“Author’s Note: The followi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ance to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Especially you Jenny Beckman. Bitch.”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누군가와 유사하다면 그건 전적으로 우연이다. 특히 너, 제니 벡먼하고는 말이다. 나쁜 년.)

그러고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톰 핸슨(조셉 고든 레빗)과 썸머 핀(주이 디샤넬)의 기본 정보를 알려주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 영화는 한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이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뉴저지 주 마게이트 출신인 톰 핸슨은 운명적인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믿음 속에서 성장했다. 이는 우울한 브리티시 팝을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고, 영화 〈졸업〉의 내용을 완벽하게 오해한 데서 비롯됐다.”

이 영화는 시간순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썸머를 완전히 잊기까지 1일부터 500일 사이의 시간을 섞어놓았다.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럽지만 날짜별로 스토리를 재구성하겠다는 불필요한 의지만 제거하면 영화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488일

두 남녀가 벤치에 앉아 있다. 여자는 반지 낀 손을 남자의 손 위로 포갠다.


1일


톰은 카드 문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원래 건축가가 꿈이었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이 회사에 입사했다.


290일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톰을 위로하기 위해 절친 둘과 여동생 레이첼이 톰의 집에 모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질문에 톰은 “갑자기 썸머가 이별을 고했다”면서 “그녀를 잊고 싶지 않아, 그녀를 되찾고 싶어”라며 썸머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시 1일

톰과 회사 사람들이 카드에 담을 문구에 관해 회의를 하던 중 사장 비서인 썸머가 회의실로 들어온다. 회사 동료들에게 짧게 자기소개를 하는 썸머. 그리고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 톰. 영화는 전한다. “톰 핸슨은 40만 개의 사무실과 9000만 개의 건물과 380만 명의 사람들 중 그녀를 찾아낸 것은 운명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를 알게 된 대부분의 남성들은 모두 썸머에게 운명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썸머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얘기다.


154일

썸머에게 푹 빠진 톰은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그녀의 미소, 머리카락, 무릎, 하트 모양의 점,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것, 웃음소리, 자는 모습. 심지어 그녀를 떠올릴 때 ‘She’s like a wind~’라는 노랫말이 귓전에 흐르는 것도 사랑하게 된다. 톰은 친구들에게 썸머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11일

톰은 여동생과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썸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썸머는 마그리트와 호퍼를 좋아해. 그녀와 바나나피시에 관해 20분 동안 얘기했어….” 하지만 동생은 일축한다. “오빠가 좋아하는 별난 허접쓰레기를 같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녀가 영혼의 반려자라는 의미는 아니야.”


28일


가라오케로 회식을 간 회사 사람들. 취한 동료 맥켄지가 택시에 오르면서 톰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썸머에게 장난스럽게 말해버린다. 맥켄지가 떠난 뒤 그녀는 톰에게 정말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본다. “그래요”라고 솔직하게 답하는 톰에게 썸머는 “친구로서?”라며 사족을 붙인다. 톰은 얼떨결에 그렇다고 말한다.


31일


회사 복사실에서 만난 썸머와 톰. 친구가 된 두 사람이지만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다. 잘 지냈느냐는 톰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썸머가 갑작스레 다가와 키스를 한다. 그러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복사실을 빠져나간다. 이날 썸머는 톰의 집까지 방문하게 된다.


34일

이케아에 놀러 간 톰과 썸머. 전시된 TV와 싱크대, 침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전시용 침대에 누운 채 썸머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넌 정말 재미있어. 난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톰은 실망하지만 일단 괜찮다며 동의한다. 데이트 마지막 코스로 톰의 집에 온 썸머.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된 톰은 ‘가벼운 관계’라 되뇌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하지만, 침대 위에서 옷을 벗고 있는 썸머를 보자 모든 우려가 사라진다.


303일

썸머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친구로 돌아갈 준비가 된 거면 좋겠는데….”


87일


레코드 숍에서 데이트를 하는 톰과 썸머. 썸머는 비틀스 노래 중에 ‘옥토퍼스 가든’이란 곡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톰은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썸머는 비틀스 멤버 중 링고 스타가 제일 좋다고 얘기하지만, 톰은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라며 썸머의 취향을 대놓고 무시한다. 하지만 언쟁도 잠시, 둘은 성인영화를 빌려 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95일

시내를 걸으며 건축에 대해 설명하는 톰.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톰은 그곳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려준다. 썸머는 자신의 팔과 펜을 내어주며 어떤 모습의 도시를 원하는지 그려달라고 하고, 톰은 썸머의 팔에 자신이 계획한 도시의 아웃라인을 그려본다.


109일

썸머의 방에 처음 들어오게 된 톰. 자신이 썸머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대한 기대감으로 톰은 더없이 행복하다.

내레이터: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톰은 그동안 둘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오직 그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느꼈다. 그건 다음과 같은 썸머의 여섯 단어 때문이었다.

썸머: 이제껏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 얘기인데(I’ve never told anybody that before).

톰: 난 다른 사람과 다르나 보지(I guess I’m not just anybody).



259일

같이 바에 간 톰과 썸머. 어떤 남자가 다가와 썸머에게 추근대는데도 톰은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다. “미국은 자유 국가”라며 떠나지 않던 남자는 톰을 향해 “저런 놈이 남자 친구라니 믿기지 않는군”이라며 모욕을 주고, 톰은 달려들어 남자에게 주먹을 날린다. 결국 남자에게 두들겨 맞은 톰. 썸머의 집으로 돌아온 둘은 다툰다. 썸머가 “자기를 못 믿겠어”라고 화내자 톰은 “너 때문에 싸운 거야”라며 강변한다. 하지만 썸머는 “정말 나 때문에 싸운 거 맞아?”라고 묻는다.


345일

썸머를 잊지 못하는 톰에게 친구가 비키라는 여자를 소개해준다. 톰은 소개받은 여자에게 헤어진 썸머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한다. 비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톰은 썸머가 계속해서 자신에게 남자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자신도 이 사실에 동의하며 썸머를 만나온 것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또한 둘이 썸머의 변덕으로 한순간에 헤어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한 여러 사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456~476일

방을 정리하는 톰. 건축 공부를 열심히 하고, 새로운 회사에 면접을 보러 부지런히 다닌다. 여러 군데에서 퇴짜를 맞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건축 일을 한다. 그 사이 썸머는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


488일

면접 보러 간 회사에 작품을 제출한 뒤 톰은 공원 벤치에 앉아 시내를 내려다본다. 뒤에서 갑자기 썸머가 톰을 부른다. “이곳에 오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그녀. (이어지는 이야기는 박스 참조)


500일

면접을 보러 간 톰. 대기 중인 그에게 면접을 기다리던 여자가 말을 건다. “앤젤러스 플라자 간 적 있어요? 거기서 본 것 같아요.” 자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그에게 “주위를 보지 않았겠죠”라고 웃어넘기는 여자. 대화를 이어가면서 서로 비슷한 취향을 가졌음을 알게 된 톰은 호감을 느꼈지만 면접 차례가 돌아온다. 나중에 차 한잔하자고 말을 걸지만 여자는 선약이 있다며 거절한다. 돌아서는 톰을 여자가 불러 세운다. “좋아요.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그러곤 여자가 말한다. “반가워요, 나는 어텀(Autumn)이에요.” 이름을 들은 톰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다시 1일.


감칠맛 나는 로맨틱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을 십분 살린 이 영화는 감칠맛 나는 대사만으로도 보는 내내 즐겁다. 썸머의 사랑관이나 연애 자세가 필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에리히 프롬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재기 발랄한 연출로 제67회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Scene in English 명대사 한 장면

488일째. 건축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던 톰은 작품을 제출한 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원의 벤치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썸머가 그를 부른다. “결혼했느냐?”는 톰의 질문에 썸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톰이 따져 묻는다. “밀러의 결혼식에서 왜 말해주지 않았나, 같이 춤을 춘 건 왜 그랬나?” 썸머는 “그러고 싶었으니까”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썸머와 헤어진 동안 사랑에 회의적인 사람으로 변해버린 톰은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운명이니 영혼의 반려자니 이런 건 없어”라고 말한다. 둘의 사랑관(觀)이 관계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뒤바뀌게 된 장면이다.


썸머: 근데 있잖아, 내가 식당에 앉아 《도리안 그레이》를 읽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서는 그 책에 대해 물어보더군… 이제 그는 내 남편이야.
Well, you know, I guess it’s 'cause I was sitting in a deli and reading Dorian Gray and a guy comes up to me and asks me about it and… now he’s my husband.

톰: 응. 그래서?
Yeah. And… So?

썸머: 만약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어찌 됐을까? 점심을 다른 곳에서 먹었더라면? 식당에 10분 늦게 도착했더라면? 그건, 그건 예정돼 있던 거야…. 그리고… 난 계속 생각해봤어…. 톰이 옳았다.
So, what if I’d gone to the movies? What if I had gone somewhere else for lunch? What if I’d gotten there 10 minutes later? It was, it was meant to be. And… I just kept thinking… Tom was right.

톰: 그럴 리가.
No.

썸머: 글쎄, 그랬다니까.
(둘 다 웃는다.)
Yeah, I did.

썸머: 난 생각했어. 너에게 어울리는 짝은 내가 아니었던 거야.
I did. It just wasn’t me that you were right about.


  • 2019년 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