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3·1운동]3개 종교 앞장서자 2000만이 "대한독립만세!"

colorprom 2019. 2. 28. 13:32



    3개 종교 앞장서자 2000만이 "대한독립만세!"


    조선일보
                                 
               

     

    입력 2019.02.28 03:01

    천도교 최고지도자 이정희 교령
    "나라 잃은 일제강점기… 천도교는 사실상 정부였다"

    천도교 이정희 교령은 “이제 동학혁명과 3·1운동을 넘어
    ‘제3의 보국안민 운동’인 평화통일을 향해 갈 때”라고 말했다. / 고운호 기자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주축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 역시 의암 손병희 선생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이정희 교령은 기회 닿을 때마다 "왜 유관순 열사만 기억하고, 손병희 선생을 잊고 있느냐?"고 묻는다. 대통령을 향해서는 "3·1운동 100주년인 올해는 꼭 서울 우이동 손병희 선생 묘소를 참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교령을 만나 감회와 계획을 들었다.

    ―천도교와 3·1운동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3·1운동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없고,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습니다. 의암 손병희 성사(聖師)님이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죠. 그런 점에서 의암 성사님은 국보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도 광복 후 환국하자마자 의암 성사 묘소를 참배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여러 차례 참배했던 것입니다. 애국지사들이 당시 천도교와 의암 선생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지만, 천도교에서는 '109주년'으로 봅니다. 준비부터 따지면 109주년이란 것입니다. 의암 성사님은 1910년 나라가 병탄되자 '보국안민(輔國安民·독립) 없이는 포덕천하(布德天下)도 없다.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다짐합니다. 1912년 우이동에 수련시설인 '봉황각'을 만들어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1918년엔 중앙대교당 건설을 명분으로 전국적인 모금을 합니다. 독립운동 자금이었죠. 당시 500만원을 모금했는데 교당 건설 비용 등은 30만원 정도였어요. 나머지는 어디에 쓰였겠습니까. 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것이죠."

    ―일제 강점기에 천도교는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나라 잃은 상황에서 천도교는 사실상 정부였습니다. 당시 국내에 인물, 조직, 자금의 3요소를 다 갖춘 것은 천도교밖에 없었습니다. 천도교는 의암 성사님의 지도 하에 이 모든 에너지를 독립운동에 '올인'했습니다. 시대와 함께, 사회와 함께한 것이지요. 3·1운동 전후로는 교육·문화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보성학교, 동덕여학교 등 재정난을 겪는 학교를 인수해 교육운동에 나섰고, 1920년대에는 '개벽' '별건곤'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며 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는 300만 교인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당시 국민들은 세 가지 점에서 천도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신분차별이 없고, 재산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다는 점이었습니다."

    ―천도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천도교 중앙총부에선 매일 오전 기도회가 있습니다. 평소엔 경전을 읽지만 2월초부터 3월말까지는 경전 대신 독립선언서 전문(全文)을 읽습니다. 사실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다 녹아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의암 성사님이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 3원칙으로 제시했고, 독립선언서에도 반영된 것이지요."

    이 교령은 최근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3·1운동의 그날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동귀일체의 개벽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천도교는 2차례의 보국안민 운동을 벌였다. 동학혁명과 3·1운동"이라며 "이제 평화통일이라는 제3의 보국안민 운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천도교, 개신교, 불교… '독립'이라는 大義 아래 뭉쳤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는 전쟁의 빌미가 되곤 했다. 멀리는 십자군 전쟁, 가까이는 IS(이슬람국가)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은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3·1운동은 세계 종교사에서도 이례적이다. 천도교, 개신교, 불교 등 3개 종교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이다. 종교간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립'이란 대의(大義) 아래 하나로 뭉쳤고, 서로 양보하고 도왔다. 천도교는 동학혁명(1894)으로 궤멸 직전 상태를 벗어나 손병희를 중심으로 교세를 회복해가는 중이었다. 1885년 언더우드(장로교)·아펜젤러(감리교)의 도착으로 시작된 개신교는 1919년 당시 30여년의 일천한 역사였다. 불교는 조선조 500년 억불정책으로 인한 질식상태에서 겨우 숨통이 틘 상황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은 탄압을 부를 것이 명백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표들은 결연했다. 손병희는 "오늘날 우리나라에 무슨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슨 결사(結社)도 없고 오직 종교단체뿐이니 천도교만이 아니라 예수교회, 불교회 등의 대표를 망라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연합을 제시했다. 개신교, 불교 지도자들도 흔쾌히 동참했다.

    훗날 일본인 관헌은 3·1운동과 관련해 세 가지 점에서 놀랐다고 했다. 첫째는 전국 규모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까지 일제가 까맣게 몰랐다는 점, 둘째는 여러 종교가 연합했다는 점, 셋째는 숱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수 개월 동안 만세운동이 지속된 점이었다고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1660.html



    천도교 독립운동이 시작된 '봉황각''중앙대교당'


    조선일보
                                 
               

     

    입력 2019.02.28 03:01

    [비밀의 두 공간]

    지휘본부이자 아지트 봉황각… 독립운동 자금 모인 중앙대교당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 이 일은 강력한 조직을 가진 천도교만이 가능하다."

    1910년 8월 국치(國恥) 소식이 알려지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중앙총부 조회에서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이보다 두 달 앞서 의암은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마치 머리 없는 사람 같이 되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주권과 토지와 인민이며,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나라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주권 없는 나라이니 머리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라 했다.

    의암 선생은 단계적·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특이한 점은 건물 2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서울 우이동 '봉황각'과 종로 한복판 경운동의 중앙대교당 건축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방식은 '외곽에서 중심으로', 첫 단추는 서울 도심에서 30리길인 우이동에 수련시설 봉황각 건설이었다.

    '값의 고하를 묻지 말고 3만평을 확보하라.' 1911년 의암은 토지 구입에 관한 명을 내리고 이듬해 6월 봉황각을 완공했다. 비록 28평짜리 한옥 건물이었지만 이곳에선 1912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21일 기도' '49일 기도'를 통해 연인원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소집돼 특별수련 과정을 거쳤다.

    [비밀의 두 공간]
    서울 우이동 봉황각 내부에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 28평짜리 이 한옥은 천도교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 김한수 기자
    [비밀의 두 공간]
    서울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당시 전국 300만 교인이 있던 천도교는 3·1운동을 앞두고 이 건물 건축을 명분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 고운호 기자
    ◇정신무장·조직점검 아지트 봉황각

    당시 '미아리부터 우이동까지 민가가 거의 없었다'(봉황각 의창수도원장 박충남)고 한다. 비밀과 보안을 유지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명목은 '수련'이지만 장차 벌어질 독립운동을 위한 정신무장과 비상연락망 점검까지 노린 포석이었을 것으로 천도교측은 보고 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인지 당시 수련회 모습을 촬영한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 35개 대교구와 193개 교구에 300만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런 막대한 자원을 독립운동에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지휘본부이자 비밀 아지트가 봉황각이었던 것이다.

    서울 우이동 봉황각 전경.
    서울 우이동 봉황각 전경.
    지난 22일 오후 찾은 봉황각. 지금 이곳은 북한산 등산로 입구다.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산로 바로 옆 봉황각은 고즈넉했다. 한옥 기와지붕 위로는 북한산과 도봉산 연봉(連峯)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다. 입구 아치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태극기가 빽빽히 꽂혀 있었다. 박충남 원장은 "초중고 학생 등 연인원 4000명 정도가 봉황각을 찾는다"고 했다.

    의암이 기획한 독립운동 2단계는 서울 경운동 '중앙대교당' 건설이었다. 1918년 의암은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를 신축하기로 하고 전국의 교인들에게 가구당 10원 이상의 건축헌금을 내도록 했다. 1918년 12월 의암은 전체 천도교인들에게 '49일 특별기도'(종령 120호)를 지시한다. 기간은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이 기간 동안 청수(淸水) 한 그릇과 백미(白米) 5홉, 촛불 3개를 준비해 매일 오후 9시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기도 주제는 '포덕천하 광제창생'. 이에 앞서 의암은 1918년 12월 24일 간부들에게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49일 특별기도가 독립운동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또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전국 9개 대표 기도지를 정하고 이곳에 간부를 파견해 기도식을 지도하게 했다. 특별기도가 진행된 기간은 천도교가 중심이 돼 3·1운동의 얼개가 짜여진 시기와 겹친다. 이 기간 동안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독립 선언서 작성과 민족대표 구성을 위해 숨가쁘게 뛰어다녔다. 이 비밀 운동에 '중앙대교당 신축 헌금'이 쓰였다. 개신교계 운동자금으로 5000원, 독립선언서 인쇄 현장을 덮친 조선인 순사를 매수하는 데 쓰인 5000원도 이 돈에서 지출됐다.

    ◇대교당 건축 명분 독립운동 자금 모아

    중앙대교당은 100년이 흐른 지금 봐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특히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층 212평 공간은 1~2층이 틔여 천장이 높은데다 중간에 시야를 가리는 기둥이 하나도 없다. 중앙대교당보다 앞서 건축된 천주교 약현성당(1892)과 명동성당(1898)은 중간중간 기둥 때문에 곳곳에 사각지대가 있다. 중앙대교당은 당초 설계 때에는 현재의 2배인 400평 규모로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가 안전을 이유로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도록 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3·1운동으로 천도교 지도부가 대거 투옥되고 일제가 착공을 막는 바람에 1920년 2월에야 공사를 시작해 1922년초에 준공할 수 있었다.

    봉황각과 중앙대교당·중앙총부 건축을 명분으로 전국적·민족적 독립운동의 큰 그림을 그렸던 의암. 그러나 의암이 정작 이 건물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사후(死後)다. 그는 1919년 11월과 이듬해 6월 잇따라 뇌출혈로 옥중에서 쓰러졌다.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1922년 6월 5일 중앙대교당에선 의암의 영결식이 열렸다. 수천명의 눈물 속에 영결식을 마친 의암의 시신은 우이동 봉황각 앞산 양지 바른 언덕에 모셔졌다. 의암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였던 중앙대교당과 봉황각은 각각 영결식장과 유택(幽宅)이 됐다.

    박충남 원장은 의암 선생의 부인 주옥경(1894~1982) 여사를 생전에 만났던 이야기를 전했다. 주 여사는 3·1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이 투옥되자 서대문형무소 앞에 집을 얻어 33인의 옥바라지를 도맡았으며 이후 천도교 여성운동에 앞장선 선구자다. 만년의 주 여사는 박 원장에게 "3·1운동 때에는 전국에서 인물, 조직, 자금이 제일 많았던 것이 천도교였는데, 광복이 되고 나니 인물, 조직, 자금이 가장 적은 종교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16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