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최고지도자 이정희 교령
"나라 잃은 일제강점기… 천도교는 사실상 정부였다"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주축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 역시 의암 손병희 선생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이정희 교령은 기회 닿을 때마다 "왜 유관순 열사만 기억하고, 손병희 선생을 잊고 있느냐?"고 묻는다. 대통령을 향해서는 "3·1운동 100주년인 올해는 꼭 서울 우이동 손병희 선생 묘소를 참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교령을 만나 감회와 계획을 들었다.
―천도교와 3·1운동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3·1운동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없고,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습니다. 의암 손병희 성사(聖師)님이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죠. 그런 점에서 의암 성사님은 국보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도 광복 후 환국하자마자 의암 성사 묘소를 참배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여러 차례 참배했던 것입니다. 애국지사들이 당시 천도교와 의암 선생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지만, 천도교에서는 '109주년'으로 봅니다. 준비부터 따지면 109주년이란 것입니다. 의암 성사님은 1910년 나라가 병탄되자 '보국안민(輔國安民·독립) 없이는 포덕천하(布德天下)도 없다.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다짐합니다. 1912년 우이동에 수련시설인 '봉황각'을 만들어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1918년엔 중앙대교당 건설을 명분으로 전국적인 모금을 합니다. 독립운동 자금이었죠. 당시 500만원을 모금했는데 교당 건설 비용 등은 30만원 정도였어요. 나머지는 어디에 쓰였겠습니까. 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것이죠."
―일제 강점기에 천도교는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나라 잃은 상황에서 천도교는 사실상 정부였습니다. 당시 국내에 인물, 조직, 자금의 3요소를 다 갖춘 것은 천도교밖에 없었습니다. 천도교는 의암 성사님의 지도 하에 이 모든 에너지를 독립운동에 '올인'했습니다. 시대와 함께, 사회와 함께한 것이지요. 3·1운동 전후로는 교육·문화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보성학교, 동덕여학교 등 재정난을 겪는 학교를 인수해 교육운동에 나섰고, 1920년대에는 '개벽' '별건곤'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며 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세 가지 점에서 천도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신분차별이 없고, 재산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다는 점이었습니다."
―천도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천도교 중앙총부에선 매일 오전 기도회가 있습니다. 평소엔 경전을 읽지만 2월초부터 3월말까지는 경전 대신 독립선언서 전문(全文)을 읽습니다. 사실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다 녹아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의암 성사님이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 3원칙으로 제시했고, 독립선언서에도 반영된 것이지요."
이 교령은 최근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3·1운동의 그날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동귀일체의 개벽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천도교는 2차례의 보국안민 운동을 벌였다. 동학혁명과 3·1운동"이라며 "이제 평화통일이라는 제3의 보국안민 운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천도교, 개신교, 불교… '독립'이라는 大義 아래 뭉쳤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는 전쟁의 빌미가 되곤 했다. 멀리는 십자군 전쟁, 가까이는 IS(이슬람국가)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은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3·1운동은 세계 종교사에서도 이례적이다. 천도교, 개신교, 불교 등 3개 종교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이다. 종교간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립'이란 대의(大義) 아래 하나로 뭉쳤고, 서로 양보하고 도왔다. 천도교는 동학혁명(1894)으로 궤멸 직전 상태를 벗어나 손병희를 중심으로 교세를 회복해가는 중이었다. 1885년 언더우드(장로교)·아펜젤러(감리교)의 도착으로 시작된 개신교는 1919년 당시 30여년의 일천한 역사였다. 불교는 조선조 500년 억불정책으로 인한 질식상태에서 겨우 숨통이 틘 상황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은 탄압을 부를 것이 명백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표들은 결연했다. 손병희는 "오늘날 우리나라에 무슨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슨 결사(結社)도 없고 오직 종교단체뿐이니 천도교만이 아니라 예수교회, 불교회 등의 대표를 망라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연합을 제시했다. 개신교, 불교 지도자들도 흔쾌히 동참했다.
훗날 일본인 관헌은 3·1운동과 관련해 세 가지 점에서 놀랐다고 했다. 첫째는 전국 규모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까지 일제가 까맣게 몰랐다는 점, 둘째는 여러 종교가 연합했다는 점, 셋째는 숱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수 개월 동안 만세운동이 지속된 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