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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특급호텔 통째 빌린 68명 日대표단… 김규식 홀로 맞섰다

colorprom 2019. 2. 27. 16:24



특급호텔 통째 빌린 68명 日대표단… 김규식 홀로 맞섰다


조선일보
                             
              
입력 2019.02.15 03:40 | 수정 2019.02.15 03:42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막전막후] [2] 파리강화회의 '韓·日 극과 극'

우사 김규식
우사 김규식


파리 시내 9구(區)의 고풍스러운 트리니테 성당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 걸어가면 사거리 모퉁이에 7층짜리 석조 건물이 나온다. 파리에서 흔한 19세기 양식 건물이다. 샤토덩가(街) 38번지의 건물 1층은 수퍼마켓 프랑프리, 2층부터는 아파트다. 낡은 아파트 출입문 왼쪽 위에 현판이 달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절단이 있던 곳'이란 프랑스어 아래 한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라고 썼다.

이곳은 우사(尤史) 김규식(1881~ 1950)이 100년 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낸 곳이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가 활동 무대였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으로 열강들을 향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이장규씨(파리7대학 박사 과정)는 "밖에서 김규식이 타자기 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1층 또는 2층에 김규식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 주말 이곳을 찾아 50대 주민에게 현판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다. 그는 "5년 넘게 살면서 무심코 쳐다보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다른 주민들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7년간 유학하며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김규식은 프랑스어도 능숙했다. 스위스에서 온 이관용, 상하이에서 온 조소앙, 미국에서 온 황기환 등이 김규식을 도왔지만 김규식이 외교 활동을 도맡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던 일본은 '세계 5강'을 자처하며 기세등등했다. 일본은 메이지 원로이자 총리를 지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대표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 68명을 파리에 파견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는 건물에서 센강이 있는 남쪽으로 15분을 걸어내려가면 방돔 광장이 나온다. 당시 일본 사절단이 머물렀던 '브리스톨 호텔(Hôtel Bristol)'이 여기 있다. 1718년 들어선 이 건물은 대표적 고급 호텔로 이름을 날렸다. 파리 중심부의 특급호텔에 자리 잡은 일본 사절단과 허름한 건물에서 고군분투한 김규식의 처지는 극과 극이었다.

日대표단이 묵은 당시 호텔… 김규식 머문 곳은 현판 하나 남아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이 묵은 파리 시내 방돔 광장 인근 브리스톨 호텔. 일본은 이 고급 호텔을 통째로 빌려 전승국의 힘을 과시했다. 지금은 브루나이 국왕이 사들여 개조한 다음 파리를 방문할 때 묵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은 김규식이 낸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
日대표단이 묵은 당시 호텔… 김규식 머문 곳은 현판 하나 남아 -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이 묵은 파리 시내 방돔 광장 인근 브리스톨 호텔. 일본은 이 고급 호텔을 통째로 빌려 전승국의 힘을 과시했다. 지금은 브루나이 국왕이 사들여 개조한 다음 파리를 방문할 때 묵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은 김규식이 낸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 /파리=손진석 특파원

일본 외교관 사와다 렌조(澤田廉三·1888~1970)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브리스톨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호텔 앞에는 30대에 가까운 자동차에 일본을 상징하는 휘장이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파리지앵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경이었다." 사와다 렌조는 외무성 차관과 주불·유엔대사를 지냈다. 1960년대에는 4차 한·일 회담의 일본 측 대표였다. 브리스톨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더 이상 호텔은 아니다. 브루나이 국왕이 사들여 가끔 파리에 들를 때 묵는다고 한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소식지 '자유 대한(La Corée libre)'을 내면서 독립 국가의 대표라는 점을 알리려 애썼다. "우리의 독립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어려운 싸움이지만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가 주권을 회복한 것처럼 한국도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로베르 브뤼셀 당시 프랑스 교육부 국장에게 프 랑스어로 쓴 김규식의 편지다. 김규식의 활동을 다룬 기사는 유럽 181개 신문에 517건이나 됐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독립국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본 요청을 받은 프랑스 경찰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김규식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두통에 시달렸다. 눈도 나빠졌다. 실망한 그는 그해 8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관련기사를 더 보시려면,

3·1 독립선언서 영어로 처음 全文 싣고 1면 톱 쓴 하와이 신문호놀룰루=이한수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0353.html



변순옥(acd****)
모바일에서 작성2019.02.1523:31:37신고
신문에 김규식의 얼굴사진과 임시정부파리위원부 사무실이었던 곳은 사진자료를 작게 구석에 배치하고, 일본대표단이 묵은 호텔은 어쩌자고 전면에 대문짝만하게 내걸었나? 독자는 현재 임시정부파리위원부 사무실 있던 건물이 볼품이 있든없든 겸허하게 독립운동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경애심을 갖을 것이다. 신문에서 사진의 크기, 위치, 이웃한 다른 자료와의 배치는 시각적 강한 영향력과 가치판단의 잠재적 선입견을 심어준다. 독립운동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무엇이 주가 되게 하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0353.html



김규식 파리로 보낸 신한청년당, 3·1운동 불 지른 기폭제


조선일보
                             
  • 박종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            
    입력 2019.02.15 03:37 | 수정 2019.02.15 05:07

    [3·1운동 100, 임시정부 100] [3·1운동 막전막후]


    선우혁을 국내로, 장덕수를 日로, 여운형을 만주·연해주로 파견해

    김규식 지원해줄 독립운동 독려

    박종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박종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처럼 대량 살상과 파괴를 일삼는 현대 문명을 대신해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려는 개조사상의 유행과 영국·프랑스·미국 같은 승전국에 의해 패전국들의 식민지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배경이 되어 발생했다.

    1919년 1월 개막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은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다. 승전국은 패전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 빼앗은 주권과 영토를 되돌릴 것을 결정했으며 전쟁을 일으킨 국가는 식민지를 포기하게 됐다. '각 민족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영향이었다.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접한 여운형을 중심으로 장덕수, 김철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당시 톈진에 머무르고 있던 김규식을 특사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조선 독립 문제를 세계 각국에 정식으로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한 김규식은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독립 외교 활동에 나섰다. 회의는 주요 결정이 조약으로 이뤄진 1920년까지 이어졌지만 당시 전승국 일원이었던 일제의 방해로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 문제를 제기하려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반대한다는 인상적인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신한청년당은 각지의 한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한인들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제대로 전달해야만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 등을 국내로, 장덕수·조용원 등을 일본으로, 여운형을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각각 파견했다.

    1919년 2월 국내로 파견된 선우혁 등은 3·1독립선언의 기독교 측 민족대표였던 이승훈·양전백 등과 만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가 확산되는 이 시기에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도모하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일본에 파견된 장덕수 등은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독려, 2·8독립선언 추진에 영향을 줬다.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여준·김약연·정재면 등을 만나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고 조선 독립을 주창하는 영문(英文) 선전문을 만들어 국외 인사들에게 널리 알렸다.

    하지만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같은 지역(상하이)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2개의 기관(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 부)이 활동함으로써 줄 수 있는 혼선을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1922년 자진 해산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임정과 함께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었던 민족자결주의를 적극 받아들여 국제사회에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국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밑거름이 된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

    공동기획: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03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