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사법성(司法省) 시찰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한 가와지는 경찰이 근대 사법의 기초임을 깨닫고
귀국 후 경찰제도 도입에 헌신한다.
1874년 경시청 창설을 주도하고 초대 총수(大警視)에 취임함으로써 일본 경찰의 기초를 닦은 것이 그였다.
그의 경찰 투신에는 아픔이 따랐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征韓論)이 좌절되자
불평사족(不平士族·舊무사계급)을 규합하여 정부와 대립하였고,
결국 이듬해 세이난(西南)전쟁의 발발로 전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가와지는 이때 경찰 총수이자 정부군 지휘관으로 사이고 토벌에 앞장섰다.
사이고는 낮은 신분의 가와지에게 출세 길을 열어준 은인이다.
연고(緣故), 인정(人情),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전근대 관념으로는 가와지가 사이고를 좇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가와지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국익의 대의와 경찰의 사명에 비추어 사이고의 반(反)정부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
했고,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사정(私情)을 버리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그 후의 역사는 가와지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하지만,
사이고를 영웅시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가와지를 배신자로 인식하는 정서가 남아 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의인을 배신자 취급하고
현실감 없는 지도자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공사(公私) 구분의 흐릿함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마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