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소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학교 폭력에 휘말려 자살한 반(班)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겠다는 딸과 엄마의 대화였다.
엄마는 지금 가면 피해자 어른들이 힘들 수 있고, 너희를 보면 죽은 친구가 더 생각날 거라면서
'마음은 알겠지만 나중에'라는 말을 반복한다.
아이를 피해자 부모의 원망과 세상의 오해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되묻는다. "나중에… 언제요? 엄마, 시간이 없어요."
얼마 전, 시인 오은을 방송에서 만났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부음을 뒤로한 후라 마음이 조심스러웠다.
그를 통해 황현산 선생이 30분 넘는 사투 끝에 쓴 글자가 자신의 이름이란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책 앞장에 쓴 황현산이란 이름이 어찌나 삐뚤빼뚤한지
글자 너머로 그간의 안간힘이 보여 코끝이 찡했다.
시인은 그의 '사인'을 보여주며 선생이 마지막 쓴 글자가 '황현산'이란 글자라 기뻤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 아버지가 암 투병 중이라고도 했다.
세상의 슬픔이 시인의 곁에 모여든 기분이었다.
그날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기억에 남는 말 하나를 이곳에 적는다.
그가 말했다. 시간은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우리는 보통 시간이 나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
하지만 시간은 내는 것이기도 해서, 그 시간에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긴 시간 직장인이었던 시인은 시간을 '내서' 시를 썼고,
바쁜 지금은 시간을 '내서' 아버지를 만난다고 했다.
이제야 겨우 아들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 시간이 너무 충만해서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다고 말이다.
시간은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시인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냈다가, 힘들게 비웠던 그 시간이 가득 채워졌던 경험에 대해서도 말이다.
왈칵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나중에'란 말로 여러 번 미뤄뒀던 오랜 친구와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