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0.30 03:09
박정양 '美行日記'
구한말 박정양은 40대 후반의 '신중하고 총명하며 정성으로 봉공하는' 신하로 고종이 특별히 신임해서
초대 주미(駐美) 전권공사에 임명된다.
조선이 외국과 동등한 자주국가의 자격으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으로
조선이 외국과 동등한 자주국가의 자격으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으로
미국의 전권공사가 부임한 데 대해 조선이 답례 삼아 파견한 11명의 보빙사(報聘使)는
외교관이라기보다 견학사절단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 열혈청년이었던 이들 중 다수가 귀국 후 급진적 개혁을 목표로 쿠데타(갑신정변)를 일으키니, 외교관 파견에 대한 조야의 반대도 컸을 것이고 고종의 입지도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지니 미국의 보호가 아쉬워져서
그러나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지니 미국의 보호가 아쉬워져서
고종은 1887년에 정식 전권공사를 파견한다.
곤궁하고 말할 수 없이 낙후된 나라,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사자와 승냥이 사이에 끼어
명줄이 위태로운 조국을 외교로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박정양을 얼마나 짓눌렀겠는가.
그래도, 외교관으로 훈련을 받은 바도 없고 나라가 재정적 뒷받침을 못 해주어 만찬 한 번을 베풀지 못하고 (전용 마차 같은) 이동수단도 없어서 발로 뛰는 외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외교관으로 훈련을 받은 바도 없고 나라가 재정적 뒷받침을 못 해주어 만찬 한 번을 베풀지 못하고 (전용 마차 같은) 이동수단도 없어서 발로 뛰는 외교도 할 수 없었지만
볼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무심히 보지 않았다.
철도망, 학제(學制), 상·하원, 기타 미국의 문물이나 제도 등은 대부분 깊이 경탄하고 부러워했고
철도망, 학제(學制), 상·하원, 기타 미국의 문물이나 제도 등은 대부분 깊이 경탄하고 부러워했고
이브닝 파티에서의 여성의 깊게 파인 의상에는 몹시 난감했으나
남편 부재시 아내가 손님을 맞이해서 접대하는 미국 풍속은 좋게 보았다.
박 공사는 미국인은 국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에서
'정밀함에 정밀함을 더하고 궁극적으로 사려하여 마침내 이를 완성시키고야 만다.
그러므로 지모와 기예가 날로 발전하니,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이유'라고 부러워했다.
그때까지 동전을 꿰어서 차고 다녀야 했던 나라의 관리에게
사람들의 신뢰에 의해 한갓 종이가 화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조폐창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로부터 130여년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을 열심히 배워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완성해가고 있는데, 이제 정부가 힘없는 비(非)조합원 노동자들을 억울하게 소외시키고 고용 세습을 일삼는 노조를 편들고
그로부터 130여년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을 열심히 배워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완성해가고 있는데, 이제 정부가 힘없는 비(非)조합원 노동자들을 억울하게 소외시키고 고용 세습을 일삼는 노조를 편들고
공기업, 공공 기관의 악랄한 채용 비리를 가려주는 듯하니
이 나라와 국민의 100년 대업(大業)이 허망하게 무너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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