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0.17 03:13
비현실적 낙관주의는 작은 실패에도 쉽게 분노
문제 생기면 곧바로 변화해야 진짜 낙관주의
가을의 여수 앞바다는 참으로 잔잔하고 따뜻하다.
여수 앞바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꼽으라면
나는 리스트의 '콩솔라시옹(Consolation)'과 바흐의 '아리오소(Arioso)'를 바로 떠올린다.
'위로'를 뜻하는 리스트의 피아노곡 '콩솔라시옹' 3번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 온다'는 표현이 어떤 건지 알게 된다.
그러나 내게 진정한 위로는 '첼로'다. 물론 여자 첼리스트가 연주할 때만 그렇다.
연주가 시작되면 난 그녀의 첼로가 된다. 그녀는 날 꼭 껴안고 연신 쓰다듬으며 위로한다.
그렇다고 마냥 안겨 어리광 부리게 놔두지는 않는다.
살짝살짝 꼬집는 피치카토의 자극도 있고, '방귀 소리'로 놀리는 글리산도의 유머도 있다.
'아리오소'와 더불어 보로딘의 현악사중주 2번은 첼로의 따뜻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아리오소'와 더불어 보로딘의 현악사중주 2번은 첼로의 따뜻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3악장 '노투르노(Notturno)'가 시작되면 나는 그대로 무너진다. 첼로의 품에 안겨 엉엉 운다.
생상스의 '백조(Le Cygne)'도 너무 좋다. 그러나 이 곡은 천장이 아주 높은 곳에서 들어야 한다.
고대로마 신전 같은 파리 마들렌 사원에서 연주된 '백조'는 엄청났다.
단아한 첼리스트가 아주 우아하게 연주했다.
그녀의 '백조'는 내 가슴을 뻥 뚫고 하늘로 날아올라 별이 되었다.
'백조'는 천장 낮은 곳에서 연주하면 안 된다. 이내 고꾸라져 '닭'이 되고, '오리'가 된다.
수유리에는 잘하는 오리구이집이 많다.
지난 10월 6일, 난 밤새 첼로만 들었다. 난 몹시 불안했고 날 꼭 안아주는 첼로의 위로가 필요했다.
그 잔잔한 여수 앞바다에 태풍이 들이쳤기 때문이다.
섬에 공사 중인 내 '미역창고(美力創考)'가 걱정되어 도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불과 5m밖에 떨어지지 않은 내 '미역창고'의 지붕은 다 뜯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전 건물의 낡은 목재 트러스를 재사용하기 위해 건물 안팎으로 엉성한 비계도 설치되어 있었다.
태풍은 여수를 스치듯 지나갔다.
천장 공사를 맡고 있는 '스틸박'이 첫 배로 섬에 들어갔다.
(소싯적 기능대회 용접 부문 메달리스트 출신의 박용태씨를 나는 '스틸박'이라 부른다.
그가 손대면 쇠가 고무처럼 착하게 변한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무 내용 없이 사진만 잔뜩 보내왔다. 공사장은 아주 깨끗했다.
아뿔싸, 너무 깨끗한 것이 문제였다. 파도가 다 쓸고 가서 깨끗한 거였다.
이어 보내온 사진에는 건물 앞에 쌓아두었던 시멘트 벽돌, 건설 자재들이 죄다 파도에 쓸려
건물 뒤로 밀려나 있었다. 밀려온 온갖 바다 쓰레기도 함께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바로 다음 배로 나도 들어갔다.
바로 다음 배로 나도 들어갔다.
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미역창고 건축을 반대하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태풍에 이상 없냐?'는 문자가 계속 들어왔다.
그들은 정말 나를 걱정해서 보낸 문자인 거 다 안다. 그러나 내겐 '그럴 줄 알았다!'는 문자로 읽혔다.
한번 비관적 생각에 빠지면 모든 것을 꼬아 생각하는 내 오래된 습관이 되살아났다.
인생 사는 데 비관주의가 아무 도움 안 된다는 것은 수년 전 교수를 그만둘 때 이미 알았다.
사태의 비관적 전망을 예고하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다.
이런 비관주의는 '지적 우월함'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나름 지식인'을 아침에 만나면 하루 종일 뭔가 불편한 거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비관주의적 태도는 아주 치명적이다.
'행복한 지식인'은 형용모순이다.
비관주의보다 아무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더 심각하다.
비관주의보다 아무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더 심각하다.
이른바 '비현실적 낙관주의(unrealistic optimism)'다.
자신의 미래에 관해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낙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다른 흡연자의 폐암 확률은 실제보다 훨씬 높게 생각하고,
자신이 폐암에 걸릴 확률은 현저하게 낮춰 생각하는 흡연자의 경우다.
한·중·일 세 나라를 비교하면 한국인의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과도한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있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실패나 좌절을 겪게 되면 아주 쉽게 분노한다는 거다.
자기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다 남 탓이다.
반만 차 있는 물컵을 보고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하는 것도 진정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반만 차 있는 물컵을 보고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하는 것도 진정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심리적 마스터베이션인 '정신 승리'에 불과할 뿐이다.
반만 남은 물을 작은 컵에 옮겨 담아 꽉 채워야 진짜 낙관적인 거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바꾸고 변화해야 진정한 낙관주의자다.
결국, 미역창고의 구조변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다 조망을 위해 커다랗게 계획한 창문은 반으로 줄여야 한다.
창문 밖에는 거센 파도에 날아들 수 있는 돌을 막는 커다란 방패막이도 세워야 한다.
서재로 쓰려 했던 미역 수조의 벽도 한참을 높여야 한다. 안 그러면 태풍 불 때마다 수영장이 된다.
이제 '폼 나는 건물'이 되기는 아예 그른 거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미역창고를 개조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며 다시 비관적이 되려 한다.
아, 논리가 이렇게 전개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어차피 책을 쓰고 그림에 몰두하려면 바다를 향한 '커다란 창'은 방해물일
뿐이다.
대신 튼튼한 3중(重) 창호의 방음은 기가 막힐 거다.
그렇게 작게 난 창문 틈으로 바다를 보며 첼로를 들으면 난 무지하게 행복할 거다.
내 낙관적 삶에는 큰 창문의 바닷가 전망보다 첼로의 위로가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내 미역창고 건축을 가장 반대한 윤광준은 속으로 분명 그럴 거다. '너 참 애쓴다!'
(사실은 나… 그 후로 자주 울컥한다.)
(사실은 나… 그 후로 자주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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