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3.21 03:03
[115] 경악한 기자 로버트 던과 인천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18세기 말 박지원의 '허생전'… 허약한 조선 경제 경고
"경제가 곧 국가" 공허한 주장으로 끝나
19세기 흥선대원군… 경복궁 공사 '당백전'
물가 폭등… 체제 붕괴… 조선 경제 몰락
1904년 미국 기자 150달러 환전하고 산처럼 쌓인 돈에 경악
1896년 일본 상인회, 인천에 곡물 거래소 설립… 조선 곡물 시장 장악
21세기 인천에 남은 100년 전의 교훈 '租界地(조계지)'
"호텔 사동이 소리쳐서 나가 보니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돈더미는 둘레가 60피트(18m)에 높이는 3피트(90㎝)였다. 서울에 있는 환전소들이 금고가 바닥나 모두 문을 닫았다."―1904년 5월 미화 150달러를 조선 돈으로 바꾼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 사진기자 로버트 던
정조 살인 청부 비용, 열다섯 냥
서기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죽었다. 닷새 만에 손자 이산이 경희궁에서 왕위를 이었다. 스물네 살이었다. 집권당인 노론 벽파는 몸을 떨었다. 새 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해 뜻을 관철시킨 집단이 아닌가.
앉아서 죽느니 뭐라도 하고 죽겠다고, 벽파는 왕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음력 7월 28일 전흥문과 강용휘라는 자객이 궁궐에 잠입했다. 두 사람은 궁궐 앞 보신탕집에서 개 한 마리를 잡아먹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었다. 전흥문은 비수를, 강용휘는 쇠몽둥이 철편(鐵鞭)을 들고 궁궐 지붕 위를 넘나들었다. 건물 아래에는 암살단 5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경비대에 걸려 암살단은 일망타진됐다.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이 사주한 일이었다.
열사흘 만에 전모가 드러났다. 일에 가담한 이유를 전흥문은 이리 말했다. "강용휘가 돈 1500문(文)과 여자 노비를 주며 함께 일하자고 요구했기에 승낙을 했다."(1777년 정조실록 1년 8월 11일) 대조선 왕국의 22대 왕을 암살하는 청부 살인 대가가 1500문(푼), 15냥이다.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으나 일의 경중을 따져보면 열다섯 냥은 보통 돈이 아님은 분명하다. 1633년 인조 때 처음 발행됐던 엽전, 상평통보는 유통이 중지됐다가 1678년 숙종 4년 다시 발행됐다. 그때 조선 정부는 400푼을 은 한 냥으로 정했다.(숙종실록 4년 1월 23일)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노비 몸값은 평균 5~20냥이었다.(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1997) 다섯 냥이면 노비를 부리고 열다섯 냥이면 국왕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눈 녹듯 사라진 돈더미"
127년이 지난 1904년 5월 어느 날 미국 사진기자가 조선에 들어왔다. 이름은 로버트 던(Dunn)이고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Collier's) 소속이다. 목적은 조선 땅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취재. 평양으로 출발 전 구리타(Kurita)라는 일본인 안내인에게 환전을 부탁했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구리타 말에 던은 미화 150달러를 건넸다. 150달러는 2017년 현재 4050달러(433만원) 정도다.(미연방준비은행 소비자물가 통계) 석양 무렵, 묵고 있던 호텔 사동이 던에게 뛰어왔다. 큰일 났다고, 구리타가 돈을 들 수가 없다고.
정조 살인 청부 비용, 열다섯 냥
서기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죽었다. 닷새 만에 손자 이산이 경희궁에서 왕위를 이었다. 스물네 살이었다. 집권당인 노론 벽파는 몸을 떨었다. 새 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해 뜻을 관철시킨 집단이 아닌가.
앉아서 죽느니 뭐라도 하고 죽겠다고, 벽파는 왕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음력 7월 28일 전흥문과 강용휘라는 자객이 궁궐에 잠입했다. 두 사람은 궁궐 앞 보신탕집에서 개 한 마리를 잡아먹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었다. 전흥문은 비수를, 강용휘는 쇠몽둥이 철편(鐵鞭)을 들고 궁궐 지붕 위를 넘나들었다. 건물 아래에는 암살단 5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경비대에 걸려 암살단은 일망타진됐다.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이 사주한 일이었다.
열사흘 만에 전모가 드러났다. 일에 가담한 이유를 전흥문은 이리 말했다. "강용휘가 돈 1500문(文)과 여자 노비를 주며 함께 일하자고 요구했기에 승낙을 했다."(1777년 정조실록 1년 8월 11일) 대조선 왕국의 22대 왕을 암살하는 청부 살인 대가가 1500문(푼), 15냥이다.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으나 일의 경중을 따져보면 열다섯 냥은 보통 돈이 아님은 분명하다. 1633년 인조 때 처음 발행됐던 엽전, 상평통보는 유통이 중지됐다가 1678년 숙종 4년 다시 발행됐다. 그때 조선 정부는 400푼을 은 한 냥으로 정했다.(숙종실록 4년 1월 23일)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노비 몸값은 평균 5~20냥이었다.(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1997) 다섯 냥이면 노비를 부리고 열다섯 냥이면 국왕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눈 녹듯 사라진 돈더미"
127년이 지난 1904년 5월 어느 날 미국 사진기자가 조선에 들어왔다. 이름은 로버트 던(Dunn)이고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Collier's) 소속이다. 목적은 조선 땅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취재. 평양으로 출발 전 구리타(Kurita)라는 일본인 안내인에게 환전을 부탁했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구리타 말에 던은 미화 150달러를 건넸다. 150달러는 2017년 현재 4050달러(433만원) 정도다.(미연방준비은행 소비자물가 통계) 석양 무렵, 묵고 있던 호텔 사동이 던에게 뛰어왔다. 큰일 났다고, 구리타가 돈을 들 수가 없다고.
그리하여 찍은 기념사진이 위 사진이다. 엽전이라 흔히 부르는 상평통보 1개는 1문, 그러니까 한 푼이다. 사진에 나오는 돈이 모두 얼마인지는 기사에 없다(세어볼 엄두는 났을까). 대신 1904년 6월 4일 자 기사에 던은 이렇게 기록했다. "1개 부대가 있어야 운반할 수 있는 돈이었다. 돈 몇 줄을 들고 2주 취재를 마치고 왔다. 그 사이 장정 스무 명이 밤낮으로 내 재산을 지켰다. 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일당을 지급하고 나니 돈더미가 녹듯이 사라졌다." 열다섯 냥이면 청부 살인까지 할 수 있던 조선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허생(許生)의 경고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소설 '허생전(許生傳)'이 나온다. 글만 죽도록 읽던 딸깍발이 선비 허생은 돈 벌어오라는 아내 성화에 진짜로 돈을 번다. 한양 갑부 변 부자에게 빌린 1만 냥으로 제수용 과일을 매점하고 갓 만들 말총을 매점했다. 얼마 못 가 조선 팔도에 제사를 지낼 이가 없었고 갓 쓰고 망건 쓴 사람이 없었다. 5년 만에 허생은 100만 냥을 벌었다. 허생이 중얼댄다. '나라 꼬라지 알 만하구나.'
허생이 한양으로 돌아와 변 부자에게 10만 냥을 주며 말한다. "조선은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한다.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진다. 만 냥만 있으면 총총한 그물로 훑어내듯 독점할 수 있다." 가난한 조선에서 매점매석으로 돈 벌기는 쉽다는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다. 후세 공무원(司者)이 이 방법을 쓴다면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다."
1780년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와 1793년에 '열하일기'를 썼으니, 허생전 배경은 18세기 말이다. 정조 암살 미수사건은 1777년이다. 돈값은 여전히 좋았다. 그런데 세상은 허생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1911년 사학자 김택영이 연암집 속집을 출판할 때까지 세상은 허생전 자체를 알지 못했다. 과격한 주장이 담긴 열하일기는 필사본으로 소수 독자층에게만 읽혔다. 종군기자 로버트 던이 돈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첫째 이유다. '조선인은 너무 가난해서 비싼 서양 상품을 살 수도 없다. 무기, 총, 가구, 포도주와 술 등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독한 술로 한국 민중을 타락시킬 개연성이 없다.'(윌리엄 길모어, '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 1894) 농업 생산력은 급증했지만 제조업이 성장하지 못했다. 관리들은 부족한 재화를 독점하거나 수탈로 해결했다. 삼정(三政·전정, 군정, 환곡)은 문란했고 국부(國富) 편중과 독점은 심화됐다. 둘째 이유는, 당백전(當百錢)이다.
경복궁 공사와 당백전
1865년 흥선대원군은 조선 왕실 권위 회복을 위해 경복궁 재건 공사에 돌입했다. 임진왜란 때 도주행각을 벌인 선조에게 분노한 백성들이 불지른 이래 경복궁은 300년 가까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공사 현장과 목재 창고에 두 번 불이 났다. 대원군은 사유림에서 목재를 베어 오도록 명했다. 마을 서낭당에서 석재를 반출했다. 한양 성문 출입에 세금을 물렸다. 공사는 물론 고종 시대 근대식 군대 창설에도 많은 돈이 투입됐다.
그리하여 1866년 11월 새로운 화폐를 찍었다. 당백전이다. 그해 11월부터 6개월 동안 발행한 당백전은 1600만 냥이다. 액면가는 당시 유통 화폐인 상평통보의 100배였다. 상평통보는 민가 금고 속에 숨었고 당백전은 유통되지 않았다. 사헌부 관리 최익현이 상소했다.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가혹한 세금을 없애고 당백전을 혁파하시라."(1868년 고종실록 5년 10월 10일) 나쁜 돈은 6개월 만에 중단됐다. 체제는 붕괴되고 있었다.
일본인이 세운 곡물거래소
1883년 인천이 외국에 문을 열었다.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 주거지가 정해졌다. 조계지(租界地)라고 한다. 조선법이 아니라 자국 국내법이 적용되는 공간이다. 조선 수도와 인접해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다. 외국인 중에는 조선을 선점한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
허생(許生)의 경고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소설 '허생전(許生傳)'이 나온다. 글만 죽도록 읽던 딸깍발이 선비 허생은 돈 벌어오라는 아내 성화에 진짜로 돈을 번다. 한양 갑부 변 부자에게 빌린 1만 냥으로 제수용 과일을 매점하고 갓 만들 말총을 매점했다. 얼마 못 가 조선 팔도에 제사를 지낼 이가 없었고 갓 쓰고 망건 쓴 사람이 없었다. 5년 만에 허생은 100만 냥을 벌었다. 허생이 중얼댄다. '나라 꼬라지 알 만하구나.'
허생이 한양으로 돌아와 변 부자에게 10만 냥을 주며 말한다. "조선은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한다.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진다. 만 냥만 있으면 총총한 그물로 훑어내듯 독점할 수 있다." 가난한 조선에서 매점매석으로 돈 벌기는 쉽다는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다. 후세 공무원(司者)이 이 방법을 쓴다면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다."
1780년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와 1793년에 '열하일기'를 썼으니, 허생전 배경은 18세기 말이다. 정조 암살 미수사건은 1777년이다. 돈값은 여전히 좋았다. 그런데 세상은 허생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1911년 사학자 김택영이 연암집 속집을 출판할 때까지 세상은 허생전 자체를 알지 못했다. 과격한 주장이 담긴 열하일기는 필사본으로 소수 독자층에게만 읽혔다. 종군기자 로버트 던이 돈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첫째 이유다. '조선인은 너무 가난해서 비싼 서양 상품을 살 수도 없다. 무기, 총, 가구, 포도주와 술 등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독한 술로 한국 민중을 타락시킬 개연성이 없다.'(윌리엄 길모어, '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 1894) 농업 생산력은 급증했지만 제조업이 성장하지 못했다. 관리들은 부족한 재화를 독점하거나 수탈로 해결했다. 삼정(三政·전정, 군정, 환곡)은 문란했고 국부(國富) 편중과 독점은 심화됐다. 둘째 이유는, 당백전(當百錢)이다.
경복궁 공사와 당백전
1865년 흥선대원군은 조선 왕실 권위 회복을 위해 경복궁 재건 공사에 돌입했다. 임진왜란 때 도주행각을 벌인 선조에게 분노한 백성들이 불지른 이래 경복궁은 300년 가까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공사 현장과 목재 창고에 두 번 불이 났다. 대원군은 사유림에서 목재를 베어 오도록 명했다. 마을 서낭당에서 석재를 반출했다. 한양 성문 출입에 세금을 물렸다. 공사는 물론 고종 시대 근대식 군대 창설에도 많은 돈이 투입됐다.
그리하여 1866년 11월 새로운 화폐를 찍었다. 당백전이다. 그해 11월부터 6개월 동안 발행한 당백전은 1600만 냥이다. 액면가는 당시 유통 화폐인 상평통보의 100배였다. 상평통보는 민가 금고 속에 숨었고 당백전은 유통되지 않았다. 사헌부 관리 최익현이 상소했다.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가혹한 세금을 없애고 당백전을 혁파하시라."(1868년 고종실록 5년 10월 10일) 나쁜 돈은 6개월 만에 중단됐다. 체제는 붕괴되고 있었다.
일본인이 세운 곡물거래소
1883년 인천이 외국에 문을 열었다.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 주거지가 정해졌다. 조계지(租界地)라고 한다. 조선법이 아니라 자국 국내법이 적용되는 공간이다. 조선 수도와 인접해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다. 외국인 중에는 조선을 선점한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
그들이 주도해 1896년 5월 5일 인천에 곡물거래소가 설립됐다. 이름은 인천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다. 미두는 쌀과 콩이고 취인소는 일본어로 거래소라는 뜻이다. 현물이 아니라 미래 가격을 예측하고 거래를 하는 선물거래소다. 석유, 명태, 면직 같은 상품도 거래하다가 얼마 안 있어 쌀이 주거래 상품이 됐다.
쌀은 조선에서 경쟁력이 강한 상품이었다. 조선인이 만든 미곡 유통조직이 탄탄했다. 이 유통조직을 우회해 미곡에 접근하려는 통로가 미두취인소였다. 일본인 상공회가 주도하고 일본영사관이 허가한, 조선 땅에 있는 일본 거래소였다.
중개는 일본인이 독점했다. 쌀은 하루 100석, 콩은 50석이 거래됐다. 현물 없이 보증금만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실물이 없는데 큰 돈이 오갔다.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투기장에 뛰어들었다. 요릿집, 술집, 여관이 항구에 들어섰다. 떼돈을 번 소수는 그 향락에 젖었다. 절대다수는 패가망신했다. '인천은 피를 빨아먹는 마굴(魔窟)'(1925년 '개벽' 56호)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조선인 반복창(潘福昌·1900~1938)은 시세를 정확하게 예측해 큰돈을 벌었다. 1920년 1년 만에 40만원(현 시세 400억원)을 벌었다. 인천에 저택을 짓고 장안 최고 미녀 김후동과 결혼을 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2등칸 열차를 전세 내 하객을 서울까지 모셨다. 서울역에서는 세단 승용차들이 하객을 조선호텔로 모셨다. 사람들은 '미두신(米豆神) 반지로(潘次郞)'라 불렀다.
정확하게 1년 뒤 미두신은 망했다. 쌀 시세가 예측불허로 급변하면서 취인소에 처박은 전 재산이 날아갔다. 미두신은 "오른다"고, "내린다"고 중얼대며 취인소 주변을 방황하다가 1938년 10월 18일 죽었다. 20일 후인 11월 7일 취인소도 폐쇄됐다. 식민 조선에서 공급받은 물자로 중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전봉관, '럭키 경성', '미두왕 반복창의 인생유전')
로버트 던이 보았던 돈더미 는 그 모든 몰락을 알리는 묵시록이었다. 지금 인천 중구청 주변 옛 조계지에는 100년 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쓰린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하여, 일부 거리는 옛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인천개항박물관에는 그때를 되살린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어찌 이리 닮은 것인가. 딸깍발이 허생이, 글 잘쓰는 박지원이, 종군기자 로버트 던이 이를 본다면 뭐라 말할 것인가.
쌀은 조선에서 경쟁력이 강한 상품이었다. 조선인이 만든 미곡 유통조직이 탄탄했다. 이 유통조직을 우회해 미곡에 접근하려는 통로가 미두취인소였다. 일본인 상공회가 주도하고 일본영사관이 허가한, 조선 땅에 있는 일본 거래소였다.
중개는 일본인이 독점했다. 쌀은 하루 100석, 콩은 50석이 거래됐다. 현물 없이 보증금만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실물이 없는데 큰 돈이 오갔다.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투기장에 뛰어들었다. 요릿집, 술집, 여관이 항구에 들어섰다. 떼돈을 번 소수는 그 향락에 젖었다. 절대다수는 패가망신했다. '인천은 피를 빨아먹는 마굴(魔窟)'(1925년 '개벽' 56호)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조선인 반복창(潘福昌·1900~1938)은 시세를 정확하게 예측해 큰돈을 벌었다. 1920년 1년 만에 40만원(현 시세 400억원)을 벌었다. 인천에 저택을 짓고 장안 최고 미녀 김후동과 결혼을 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2등칸 열차를 전세 내 하객을 서울까지 모셨다. 서울역에서는 세단 승용차들이 하객을 조선호텔로 모셨다. 사람들은 '미두신(米豆神) 반지로(潘次郞)'라 불렀다.
정확하게 1년 뒤 미두신은 망했다. 쌀 시세가 예측불허로 급변하면서 취인소에 처박은 전 재산이 날아갔다. 미두신은 "오른다"고, "내린다"고 중얼대며 취인소 주변을 방황하다가 1938년 10월 18일 죽었다. 20일 후인 11월 7일 취인소도 폐쇄됐다. 식민 조선에서 공급받은 물자로 중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전봉관, '럭키 경성', '미두왕 반복창의 인생유전')
로버트 던이 보았던 돈더미 는 그 모든 몰락을 알리는 묵시록이었다. 지금 인천 중구청 주변 옛 조계지에는 100년 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쓰린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하여, 일부 거리는 옛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인천개항박물관에는 그때를 되살린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어찌 이리 닮은 것인가. 딸깍발이 허생이, 글 잘쓰는 박지원이, 종군기자 로버트 던이 이를 본다면 뭐라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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