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114](2)壬亂 후 부산에 일본 그릇공장이 서고, 기술은 역전됐다

colorprom 2018. 3. 14. 17:42

[박종인의 땅의 歷史]

壬亂 후 부산에 일본 그릇공장이 서고, 기술은 역전됐다


조선일보
                             
             
입력 2018.03.14 04:01

[114] 초량왜관과 도자기 OEM공장 부산요(釜山窯) ②·

7년 만에 임진왜란 끝나고 1609년 국교 정상화
왜관에 그릇공장 설립… 日 상류층 인기 茶器 생산
디자인과 감독은 일본인, 생산은 조선 사기장
재료는 조선 '공짜 제공', 제품은 전량 일본 반출
79년 만에 공장 문닫아… 조선, "무상 제공 민폐" 일본 기술이 조선 추월
왜관 내 신사(神社)에는 가토 기요마사 모셔
'공존의 땅' 왜관에서 눈뜨고 당한 조선 정부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임진왜란 그리고 국교 정상화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3년 뒤 한양 사람 박언황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박언황은 조정에 출석해 일본 종군 승려 겐소(玄蘇)로부터 들은 말을 이렇게 전했다.

"일본이 여러 번 강화를 청하여도 귀국에서는 매번 중국을 핑계대어 강화(국교 정상화)하려 들지 않는다. 만약 군사를 출동시켜 바다를 건너면 강화하려 해도 늦을 것이다. 지금 중국 군사의 위엄만 믿고 강화하지 않고 있는데, 중국 군사가 철수한 후에는 비록 대병(大兵)을 내지 않더라도 몰래 틈을 타 곳곳을 침범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말은 이어졌다. "지금 그대 나라는 동서(東西)로 붕당(朋黨)이 나뉘어 있어 의논이 일치되지 않고, 혹 강화를 하려는 자가 있어도 만 가지로 의심하여 대사(大事)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내가 자세히 알고 있다."(선조실록 1601년 음력 8월 17일)

과거는 잊고 국교를 정상화하자는 말이었다. 섣불리 복수전을 벌이려 하다가는 불바다가 되리라는 협박도 숨어 있었다. 그해 조선과 일본은 교섭에 들어갔다. 공식적인 국교 정상화는 8년 뒤인 1609년에 이루어졌다. 기유약조라 한다.

국교 정상화를 주도한 사람은 소 요시토시(宗義智), 19대 대마도주였다. 일본의 새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인 소 요시토시를 앞세웠다. 임진왜란 첫 전투가 벌어진 절영도에 간이 숙소를 차려놓고 양국은 교섭을 벌였다. 막대한 민간 피해를 입은 조선은 포로 송환을 통해 노동력 확보를 원했다. 일본은 통상을 원했다. 교역을 통해 부(富)를 창출하고자 했다.

조선 사발과 일본 차

당나라 시대에 유행한 다법(茶法)은 말차였다. 입이 넓은 사발에 차 가루를 넣고 섞어 마시는 법이다. 찻잎 제조법이 까다롭고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 명나라 때는 황제 명으로 금지했다. 그때 보편화된 엽차(葉茶)가 지금 한국인이 흔히 즐기는 다법이다. 성리학 세상인 조선에서도 말차가 급감하고 엽차가 일상화됐다. 일본은 조금 달랐다. 사무라이들이 둘러앉아 차 사발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는 일본식 다법으로 이어졌다. 찻잔 감상이 중요한 요소였다. 일본 다법은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이 들여왔다. 침잠과 명상을 중시하는 선승(禪僧)이다. 이들이 주도한 차 문화가 일본적 미학을 형성했다.

경남 해안지역에서 나온 조선 사발. 일본이 이도다완이라 부르며 찬미하는 차사발의 원형이다.
경남 해안지역에서 나온 조선 사발. 일본이 이도다완이라 부르며 찬미하는 차사발의 원형이다.

와비(侘), '차분할 것이며', 사비(寂), '한적할 것'. 이 미의식에 적합한 찻잔이 조선 다완이었다. 화려하고 정교한 당·송시대 찻잔 대신 어딘가 빈 듯한 조선 찻잔이 일본 미학에 맞았다.

공식적 무역이 금지된 오랑캐 왜국(倭國)이었다. 조선을 오가는 일본 승려들은 조선 사발을 봇짐에 넣고 현해탄을 건넜다. 임진왜란 전 일본인에게 개방된 삼포(三浦), 즉 부산포와 창원 제포, 울산 염포가 그 창구였다.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된 조선 다완, 이도다완(井戶茶婉)은 바로 창원 제포, 그러니까 웅천에서 만든 그릇이라고 추정한다(권상인 경성대 공예디자인과 교수). 원래 용도는 알 수 없다. '막사발'(통도사 율원장 덕문 스님), '제사용 그릇'(사기장 신한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창작품'(사기장 최웅택). 금이 잘 가고 깨지기 쉬워 생활용품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막사발이 됐든 창작품이 됐든 조선에서 사발은 사라졌다. 일본에 남은 사발 150여개는 모두 1500년대 중반 반짝하고 생산된 제품들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이 '와비사비한' 그릇에 환장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이 다완 때문에 벌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일본 다도의 시조 센노 리큐(千利休)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 되었다. 도요토미는 '천하의 명기(名器)를 수집하며 다도를 크게 일으켰다'(아사가와 노리타카, '부산요, 대주요', 1929). 남원과 남해안 일대 사기장들이 대거 일본으로 납치된 것도 이 찻그릇 때문이었다.

왜관 시대와 공장 설립

그러니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에게 국교 정상화는 돈이었고, 바로 사발이었다. 제대로 된 조선 사발만 있으면 권력 유지와 돈벌이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정상화 교섭 도중인 1607년 부산 두모포에 왜관(倭館)이 설치됐다. 그리고 1639년 소 요시토시의 아들, 20대 대마도주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다완 견본을 부산 동래부에 보내 가마 설치를 요청했다. 동래부에서는 중앙정부 예조의 허가를 받고 왜관 바깥에 가마를 허가했다.

초량왜관의 설치

옛 초량왜관의 중심인 용두산공원.
옛 초량왜관의 중심인 용두산공원.

두모포왜관은 협소했다. 양국 간 교역량이 늘면서 조선 정부는 지금 부산 용두산공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왜관을 만드는 데 합의했다. 30년에 걸친 협상이 만든 결과다. 1678년 숙종 4년 자그마치 10만평에 이르는 일본인 전용 신도시가 건설됐다. 조선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 기술자와 건축 기법이 망라됐다. 초량왜관이라고 한다.

왜관 내 용미산에 설치된 옥수신사(지금 롯데몰 자리)에는 신라를 침공했다는 다케우치 노스쿠네(武內宿禰)가 모셔져 있었다. 1819년 이 신사에는 또 다른 신이 들어왔다. 이름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조선인이 악귀(惡鬼)라 저주하던 그 장수다. 조선 정부는 몰랐다. 알고도 모른 척했거나.

초량왜관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까지 대마도에 의해 운영됐다. 조약 후 일본 외무성으로 이관된 왜관은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이 주로 살았다. 6·25전쟁 때 피란민이 몰려들고 난개발에 빠져들면서 초량왜관 흔적은 몽땅 사라졌다. 왜관 관장이 살던 관수가(館守家)는 훗날 부산시청이 됐다가 지금은 모텔이 들어섰다. 관수가로 오르는 계단 흔적은 남아 있다. 주요 도로와 골목은 그대로이나 건물 흔적은 찾기 어렵다.

부산요의 설립

알음알이로 운영되던 그릇 공장이 초량왜관에 정식으로 설립됐다. 1929년 일본 학자 아사가와 노리타카(淺川伯敎)는 이를 '부산요(釜山窯)'라 명명했다. 부산요가 있던 자리는 지금 로얄호텔 부근 기슭이다. 운영 방식은 똑같았다. 조선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조선 기술자를 차출해주면 왜관에서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덤으로 대마도에서 요구하는 양의 흙을 구해다 주었다.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낸 주문서. 문양과 크기, 색깔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낸 주문서. 문양과 크기, 색깔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흙과 조선 도공, 사기장에 대한 요구는 해마다 이어졌다. 1644년 가마가 왜관 안에 정식으로 설치됐다. 하시쿠라 주스케(橋倉忠助)라는 일본 사기장이 일본 측 기술자로 파견됐다. 백토 80석, 약토 10석, 황토 50석, 조선 사기장 6명이 요청에 의해 투입됐다. 기술자는 불규칙적으로 계속 파견됐다. 일본 기술자는 에도 막부의 요청임을 앞세워 주문서를 함께 가져왔다. 1707년 일본에서 마쓰무라 야헤이타(松村彌平太)라는 기술자에게 보낸 주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구경 9촌, 높이 6촌, 굽 높이 1촌, 유약은 노르스름하게.'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에는 대마도에서 요청하고 조선이 공급한 재료 명세가 기록돼 있다. 1696년 7월에는 경주 백토 100석, 울산 약백토 100석, 김해 감적토 120석, 옹기토 30석, 하동 백토 40석과 곤양백토 40석, 진주 백토 40석이 지급됐다. 이렇게 1644년부터 1692년까지 무상 지급된 흙 총량은 350t이다(권상인, '왜관요에 관한 소고', 2016). 나카야마 이산(中山意三), 아히루 모산(阿比留茂山), 마쓰무라 야헤이타 같은 기술자들이 와서 직접 생산도 하고 감독도 했다. 마쓰무라는 조선 기술자와 알력 끝에 자살했다.

이들이 만든 그릇들이 1913년 대마도 제1도시 이즈하라(嚴原) 경매장에 불쑥 나온 것이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조선 다완에 말차 말아 마시는 '와비사비한 멋', '메이드 인 조선' 오리지널 다완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더군다나 디자인도 일본인 입맛에 꼭 맞는 맞춤형이었으니.

OEM 공장, 문을 닫다

부산요는 1717년을 끝으로 78년 만에 폐쇄됐다. 조선 정부에서 더 이상 땔감과 흙 무상 공급을 거부했다. "병자호란 후 조선에 평화 시대가 왔다. 민폐를 무릅쓰고 무상 공급할 이유가 없었다."(권상인) 일본 측에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더 이상 조선 그릇을 수입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조선 민요(民窯) 품질이 매우 떨어졌다. 두껍고 무거운 기물이 되어 찻잔으로 쓰기에 곤란했다."(아사가와 노리타카) 무엇보다 조선에서 그릇을 생산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의 자기 제조 기술이 조선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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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공연이 한창인 부산 광복동. 광복동 일대는 조선 후기 초량왜관이 설치된 장소였다. 10만 평이 넘는 일본인 전용 신도시였다. 일본은 이곳에 당시 조선이 가진 최첨단 기술인 도자기 공장 부산요를 운영했다. 기술과 재료가 이를 통해 무상으로 유출됐다. /박종인 기자
평화의 성취와 기술 진보, 이 두 가지가 부산요가 문을 닫는 계기였다. 왜관 속 신사에 누가 모셔져 있는지 알려 하지도 않고, 공짜로 내준 기술자와 흙이 뭘 뜻하는지도 몰랐던 조선 지도자들의 무지가 만든 결말이었다. 일본에겐 '공짜로' 배워간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전쟁 때 끌고 간 조선 기술력이 만든 결과였다.

21세기 대한민국 부산 광복동

초량왜관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대신 초량왜관 부산요에서 굳이 생산하려 했던 조선 차 사발은 지금 전국 사기장들이 재현하고 있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묻는다. 누가 그 미학을 발견했는가. 조선인, 대한국인 그 누구도 몰랐던 그 미학을 토착화해낸 사람은 일본 인이다. 400년 전 그 그릇을 만든 장인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해놓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소비하는 미학을 마치 우리가 찾아낸 것처럼 자랑한다면, 솔직하지 못하다.

왜관이 있던 부산 광복동은 한류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붐빈다. 400년 전 지도층이 무관심했던 그 기술과 문화와 미학이 기적적으로 세상을 부른다. 문화의 주인은 소유한 자가 아니다. 즐겨야 주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14/20180314004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