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죽음]내가 떠나면 내 아이들이 마저 살겠지 (지춘희, 조선일보)

colorprom 2018. 7. 27. 14:01

[나 떠나는 날엔] [13] 내가 떠나면 내 아이들이 마저 살겠지


조선일보
                             
  • 지춘희 패션디자이너            
    •  
    입력 2018.07.27 03:01

    지춘희

    지춘희 패션디자이너
    지춘희 패션디자이너



    잔치라는 말처럼 예쁜 것도 없다.

    이 소박한 우리말은 폭넓은 치맛자락처럼 들리기도 하고 너른 들판에 한껏 차려진 음식을 떠올리게도 한다.

    파티라는 외국말보다 시각적이고, 연회나 향연이라는 한자말보다 편안하다.

    살면서 잔치라는 걸 꽤 여러 번 치러봤다.

    매년 두 번씩 치러야 했던 패션쇼가 그랬고, 딸아이 결혼시킬 때가 그랬다.

    주변 아끼는 동료·후배들 시집 장가 잔치도 지켜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날이 있다. 아끼는 후배의 결혼식이었다.


    어느 시골 마을의 드넓은 밀밭 앞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들꽃을 꺾어 부케 삼았고 하객들과 다 같이 어머니가 끓인 국수를 나눠 먹었다.

    새소리가 축가처럼 들렸다. 찬연한 오후였다.

    나 죽는 날의 세리머니를 이러쿵저러쿵 요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서도,
    가능하다면 나 역시 나 떠나는 날이 소박한 잔치가 됐으면 한다.
    누가 떠났다고 눈물 찍어내기보단 삼삼오오 모여서 그간 못다 한 이야기 나누며 웃어줬으면 좋겠다.
    찾아온 손님에게 음식은 그래도 제대로 먹여 보냈으면 좋겠다.
    육개장은 제대로 칼칼했으면 하고, 누른 돼지고기는 딱딱하지 않았으면 한다.
    후식으로는 제철 과일이나 채소를 냈으면 좋겠다. 봄이라면 복숭아, 여름이라면 자두.
    밥 한 그릇 먹고 일어설 때 기왕이면 그래도 '잘 먹었다'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날씨와 빛에 민감한 편이다. 색을 쓰고 옷을 짓는 디자이너로 살아와서 그럴 것이다.

    모든 날씨는 그것대로 아름답다. 비 흩뿌릴 땐 그래서 좋고, 구름 끼면 또 그대로 포근하다.

    햇볕 들면 모래알 하나까지 생생하고 또렷해 보인다.

    떠나는 날 날씨가 어떠하든 다들 또한 그것대로 즐겨줬으면 좋겠다.

    우중충한 장례식장에 갇혀 있지 않았으면 한다.

    밖으로 나가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바람결도 느끼다 각자 집으로 흩어져 줬으면 좋겠다.

    햇빛 쨍쨍하면 다들 해먹에 눕거나 낮은 의자에 앉아 실컷 햇볕 쬐다 가도 좋겠다.

    산다는 건 결국 잇는 것이다.

    내가 떠나도 내 아이들이 마저 살아간다.

    다들 잔칫상 음식 한껏 푸짐하게 먹고, 이런저런 수다 한판 떨고,

    경망스럽다 하지 않을 만큼 즐겁게 기념 촬영도 하고,

    그러다 힘내서 자리 털고 일어나 기운차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


    나 떠나는 자리가 그런 잔치가 되고 남은 사람들을 위한 응원의 자리가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이마저도 욕심이라고 누가 나무란다면 크게 할 말 없겠지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7/20180727001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