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33) 모윤숙(1910~1990) (김동길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8. 7. 7. 16:55


[Why] 그토록 사모했던 '시몬'은 누구일까, 혹시 춘원은 아니었을까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          
    입력 2018.07.07 03:00

    [김동길 인물 에세이] (33) 모윤숙(1910~1990)

    [김동길 인물 에세이]
    이철민 기자
    나는 일제하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태어날 때 이미 조선은 사라지고 일본만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 망명 중이던 김구, 이승만
    국내에서 투쟁한 이상재,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 애국지사들을 존경하면서 젊은 날을 보냈다.

    해방이 될 때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도 내 눈으로 지켜보았고
    견디다 못해 38선을 넘어 월남하였으며 지금도 살고 있는 신촌의 이 집에서 6·25 사변을 겪었다.

    조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고생하며 살다가 나는 이제 나이 90이 되었다.
    어찌하여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따질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이제는 몇 남지 않은 한 시대의 증인임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설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708명의 친일 인사 명단을 발표했다고 들은 지는 오래지만 들춰 볼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려고 하는 시인 모윤숙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있다고 하기에 거기에 실린 700여 명의 명단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일제시대부터 우리가 훌륭한 인물로 여겨온 많은 명사의 성함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특위가 생겨 반민족 행위자로 지목되었던 친일 인사들이 일단 고발되고 조사를 받고
    구속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절차를 밟으며 그들이 무죄판결을 받기도 하고 사면을 받기도 하여 일단 그 업무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후배들이 나서서 낡은 신문과 잡지들을 뒤져가며
    단 한마디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유리한 말을 하였다면 사회적 신분을 따지지 않고 정죄하고
    그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경솔한 처사다.

    군사재판에도 피고의 최후 진술은 있게 마련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한마디 해명도 들어 보지 않고 민족 반역자로 몰아붙여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던 그해,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거기서 소학교를 마치고 함흥에 가서 성장하였으며 그 뒤 개성에 있던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에 이화여전 문과에 들어가 3년 뒤 졸업하였다.

    모윤숙은 만주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심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1년 잡지 '동광'에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여 문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 뒤에 서울에 돌아와 배화여고의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어떤 분의 주선으로 철학박사 안호상과 결혼을 하였으나 곧 그만뒀다.
    '결혼과 동시에 이혼'이라는 표현도 지나친 말이 아닐 텐데,
    신랑에 대하여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그 남편이 결코 이상적 남성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모윤숙은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한 여성이어서
    남북한 동시선거를 꿈꾸던 UN메논을 단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울에 파견했을 때
    메논 단장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북의 김일성은 남북한 동시선거를 거부하였다.

    부산 피란 시절에는 광복동에 '필승각'이라는 집을 마련하고
    김활란과 합심하여 대한민국의 승리를 위해 외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 한 수도 모윤숙의 애국심이 아니고는 세상 빛을 볼 수 없는 걸작이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나는 죽었노라, 25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거두었노라 /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오늘도 이 시 한 수는 6·25의 경험을 가진 모든 한국인을 눈물짓게 한다.

    꿈을 잃고 일제하에 신음하던 우리 젊은이들을 모두 감동시킨 산문시가 모윤숙의 '렌의 애가'였다.
    우리는 그가 '시몬'이라고 부른 그 남성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1937년에 모윤숙이 이 땅의 한 젊은 여성으로 그토록 사모했던 그 '시몬'은 누구일까.
    혹시 춘원 이광수가 아니었을까.

    "시몬! /당신의 애무를 원하기보다 당신의 냉담을 동경해야 할 저입니다. 용서하세요 /
    그러나 당신의 빛난 혼의 광채를 벗어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
    당신이 알려 준 인생의 길, 진리, 평화에 대한 높은 대화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지각없는 사람이 모윤숙에게 질문하였다. "선생님, 시몬은 누구입니까."
    모윤숙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동경한 오직 한 사람의 남성이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윤숙이 그 짧은 결혼 생활에서 매우 총명한 딸을 하나 낳아 아름답게 키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자상하고 다정한 어머니이기도 했다면 믿기 어렵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윤숙은 여장부였고 여걸이었고 뛰어난 시인이었고 훌륭한 어머니였다.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소생하여 요양 중이던 모윤숙의 자택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졌으나 80을 바라보는 노인답지 않게 그는 당당하고 엄숙한 모습의 할머니였다.

    그의 밝은 미소와 통쾌한 웃음소리가 그리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배달의 딸 시인 모윤숙.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6/2018070601849.html



    신은주(tlsd****)모바일에서 작성2018.07.0713:11:31신고
    이북은 일찌감치 토지를 무상접수해서 무상분배해 주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넘어온 서북청년단은 모두 이북의 지주집안들이었다고 들었는데,
    김교수님은 토지를 못받으신것인지 어떻게 못살게 당해서 내려오신것인지요?
    신은주(tlsd****)모바일에서 작성2018.07.0713:06:44신고
    모윤숙 국어책에 나오던 이름에대해 인간적으로 알려주시니 더욱 친근감이듭니다.
    너도나도 sns에 시달리는 오늘날 깊은산속 금강송 한그루같았던 분들이 그립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6/20180706018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