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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프리오리'를 아십니까 (김태익 위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6. 19. 15:02

[태평로] '아 프리오리'를 아십니까

조선일보
                             
              
입력 2018.06.19 03:15

칸트학회에서 全集 발간하면서 原語 그대로 표기해 논란 일어
서양 낯선 개념 옮겼던 일본처럼 번역어 찾는 노력도 지식인 책무

김태익 논설위원
김태익 논설위원



졸문에서 '아우라'란 외래어를 썼다가 독자에게 핀잔 들은 일이 있다.

아우라(aura)는 미술품 등에서 원본이 갖고 있는 흉내 낼 수 없는 기운과 감동 같은 걸 뜻한다.

예술 관련 책에선 낯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독자 한 분이 댓글을 달았다.

"아우라? 문맥상 무얼 뜻하는지는 알겠는데 너무 어렵다. 내가 무식해서 그러나?"

그 의미를 전하되 좀 더 많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고민할 수 없었는가.

독자는 그렇게 추궁하고 있었다.

사실 나 역시 글을 읽다가 생경한 말들의 행진에 질려 책을 덮은 적이 한두 번 아니다.

특히 서양의 높은 지성을 소개하는 글들이 그랬다.


아우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어려운 말로 '프리오리(a priori)'라는 게 있다.

칸트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개념 중 하나라고 한다.

이 말을 놓고 요즘 철학계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칸트학회가 국내 처음 '칸트 전집'을 발간하면서 이 말을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아 프리오리'라고 쓰기로 한 게 발단이다.

그간의 연구서에서 '아 프리오리''선험적' '선천적' '선차적(先次的)' 등으로 번역돼 왔다.

그러나 학회가 칸트의 또 다른 중요 개념인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을

먼저 '선험적'으로 번역하기로 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학회는 두 차례 학술회의를 열어 '아 프리오리'에 합당한 번역어를 찾으려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a priori'를 그냥 '아 프리오리'로 쓰기로 했다.

칸트가 쓴 '아 프리오리'는 문맥에 따라 워낙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한다.

단어 하나 번역을 위해 두 차례나 학술회의를 열었다는 것만도 우리 학계에선 보기 어려운 일이다.

칸트학회의 고충은 알겠다. 그들의 노력도 이해한다.

그렇다고 국내 칸트 전문가들이 칸트 연구 100의 성과를 집대성했다면서

칸트의 핵심 개념을 번역 못 하고 독자에게 떠넘긴 게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공 학자들도 해결 못 하는 걸 날것으로 던져놓으면 독자들에게 읽으라는 소린가 말라는 소린가.

'사회' '개인' '근대' '()' '연애' '존재'.

150년 전 일본은 서양의 낯선 개념들을 번역하며 완전히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서로 다른 번역어들이 경쟁했고, 이 가운데 좀 더 나은 말들이 공감을 얻어 정착됐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은 서양의 개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서양 지식 도입사()일본의 이런 치열한 지적(知的) 노력에 무임승차해 온 측면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보다 100년 뒤늦게 '칸트전집'을 내면서 '아 프리오리'를 번역 못 해 날것으로 내놓는다면

우리가 그동안 해 온 것은 무엇인가.

'a priori'가 한국 철학책에서 '아 프리오리'로 남아있는 한

한국인들의 사유와 칸트 철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江)이 있는 것이다.

20여년 전 라캉, 들뢰즈, 데리다 같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저서가 학계와 출판계를 풍미한 적이 있다.

이들의 사상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넓고 깊게 했는지 알 수 없다.

만약 기대에 못 미쳤다면 번역어 문제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조건 쉬운 말만 쓰자는 게 아니다.

좀 더 고급한 사유를 발전시키되,

아무리 어려운 개념이라도 최대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을 갈고 닦는 건 지식인의 책무다.

'아 프리오리'에 관해서 다른 해법은 없을까.


칸트학회 회원들은 그걸 찾아내리라 믿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18/20180618035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