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5.31 03:13
[김기철 논설위원이 만난 봉변 당한 탈북자 정성산 감독]
뮤지컬 홍보차 보수집회 갔는데 시사프로에 영상 10여초 나간 후
운영하던 식당에 스프레이·벽보
"범인은 영웅처럼 사진 올리고 댓글엔 '아버지 죽인 놈' 욕설
구청엔 식당 겨냥 민원 쏟아져… 아내가 울면서 이민가자더라"
김기철 논설위원
엊그제 만난 정성산(49)씨의 얼굴은 어두웠다.
지난주 몸이 너무 안 좋아 입원까지 했다고 한다.
키 163㎝의 왜소한 몸집인데, 한 달 새 4㎏이 더 줄었다고 했다.
2006년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만들어 주목받은 정씨는
2011년 탈북자 출신 첫 상업 영화 감독으로 데뷔할 만큼 성공 신화를 써왔다.
그러다 지난달 22일 세월호 단식 농성을 반대하는 우파 집회를 다룬 MBC 시사 프로그램에
모습이 10여 초 나가면서 사달이 났다.
지난달 30일 새벽 정씨가 운영하는 인천의 한 냉면집 창문에
누군가 노란색 스프레이로 세월호 추모 리본을 커다랗게 그리고 정씨를 비난하는 벽보를 붙이고 달아났다.
범인은 인터넷에 범행 당일 사진을 올리고 자랑까지 했다.
이 사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무용담처럼 퍼지면서
정씨에게 "아버지까지 죽이고 도망 온 놈" 같은 욕이 쏟아졌다.
그뿐 아니었다. 구청 직원들이 '신고가 들어왔다'며 사흘거리로 단속 나왔다.
"바퀴벌레가 나온다" "원산지 표시가 안 돼 있다" "화장실 통로에 불법 가건물을 설치했다"….
한 구청 직원은 "혹시 원한 산 사람이 있느냐"고도 물었다.
구청을 드나들며 소명하느라 바빴던 정씨는 "모두 관두고 이민 가자"는 아내 말에 무너져내렸다.
지난주 페이스북에 "식당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는 글을 올렸다. 정씨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누가 구청에 신고했다는 건가.
"신고자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이달 들어 우리 식당을 겨냥한 민원이 쏟아진다고 했다.
사흘에 한 번씩 구청에 가 해명하고 있다.
바퀴벌레가 나왔다길래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그런 자료는 없다고 했다.
바퀴벌레 같은 해충 구제는 처음부터 전문 업체에 맡겼다.
음식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안 돼 있다고 하길래 메뉴판에 적혀 있다고 답했다.
벽에도 크게 써 붙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불법 건축물이라며 건축주까지 신고했다.
위생관리과, 건축과 등 돌아가며 조사하러 나온다."
―방송 나간 후 식당에 항의 전화가 하루 100통 걸려왔다는데.
"다짜고짜 "거기 '일베 식당'이냐" "당신 같은 사람이 음식 만들어 팔면 되냐" 하고 시비조로 나왔다.
전화를 끊으면 다시 걸어오고….
건장한 사람 대여섯 명이 가게에 와서 소주 한 병 시켜놓고 서너 시간씩 앉아 있다 가기도 했다.
한번은 밤에 가게 밖 공터로 나가서 얘기 좀 하자고 하길래 따라가다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낯선 손님이 계산하러 카운터로 걸어와도 식은땀이 난다."
―스프레이 테러 사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며칠 전 피해자 조사를 받으러 갔다. 그 짓을 한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과 글을 경찰관이 보여줬다.
우리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어 올리고, 거사 치르듯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진짜 형이 한 거야? 진심 존경' '와, 영웅이네' 같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아버지 죽이고 도망친 나쁜 놈' '끝까지 가만두지 않겠다' '넌 퍽치기 당할 거다' ….
읽다가 가슴이 답답해 토했다."
―인터넷에서 당신이 표적이 됐다는 뜻인가.
"이 사람이 올린 게시물을 이런저런 사이트에서 퍼 나르면서 그는 영웅이 됐다.
난 이런 장면에 익숙하다. 북한에 있을 때 인민재판을 여러 번 봤다.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군중 의견을 묻는다.
그러면 미리 짠 각본대로 '때려죽여라' 같은 고함이 주위에서 터져 나온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딱 인민재판 보는 것 같다."
―북한 당국이 탈북한 중국 식당 여종업원들 북송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우리 사회에도 북의 요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끼리는 단체로 망명 신청을 해야 하나 하는 얘기가 진지하게 오간다.
이런 식으로 탈북자들을 흔드는 게 말이 되나. 탈북자들이 흥정거리도 아니고.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회담 때 탈북자들을 위해 남북 관계를 잘 이끌어가자고 했다는데,
난 그런 말 믿지 않는다. 탈북(脫北)하게 내몬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태영호 공사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이러다 황장엽 선생처럼 되는 게 아니냐고들 한다."
정씨는 "탈북자들은 정말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이다.
가족과 헤어져 혼자 목숨 걸고 넘어온 이가 대부분 아니냐"고 했다.
"북한 보위부 해외 파견 직원들은 탈북자들이 나오는 '모란봉클럽' 같은 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탈북자들이 쓴 책도 주문해 읽는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탈북자 송환을 요구하는 건 이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붙잡아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런 전술에 무방비로 당하고 있다."
―판문점에서 최근 두 차례나 남북 정상이 만났다.
미·북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단번에 평화가 올 것처럼 믿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 체제에서 살아본 경험으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김정은이 그렇게 쉽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방송에 나온 2014년 집회에서 세월호 유족을 비난하는 얘기를 했나.
"지인이 콘서트 형식의 우파 집회가 열린다고 해서
당시 공연 중이던 뮤지컬 '평양 마리아' 티켓을 가져가 나눠주고, '멸공의 횃불' 같은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MBC를 언론중재위에 제소했고, 반론 보도를 기다리고 있다."
―식당 문을 닫겠다는 글을 올릴 만큼 어려운가.
"'요덕 스토리'를 올릴 때보다 더 힘들다.
그때도 공연 내용을 트집 잡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거나
'공연하면 너희 부모처럼 때려죽이겠다'는 협박 문자를 받았다.
지금은 전방위적으로 공격이 들어온다. 끊임없이 시달릴 것 같다 보니 견디기 어렵다.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는 것 같다.
아내가 울면서 '다 접고 이민 가자'고 했다. 다음 날 폐업 예고 글을 올렸다."
지난 24일 글을 올린 정성산씨 페이스북엔
"정 감독님, 힘내세요" "포기하면 안 됩니다" 등의 응원·격려 댓글이 달렸다.
정씨는 소송을 돕는 정준길 변호사와 폐업 여부를 의논하다가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지금 문 닫으면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식당에 격려차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많았다.
멀리 제주도와 부산서도 오고, 음식값을 내며 '돕고 싶다'고 꼬깃꼬깃 지폐를 건네주는 분도 있고…."
'닥치고 잘 가라, 축하한다' '북으로 돌아가라'는 비난 댓글도 섞여 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씨는 지난 주말 식당 직원들을 모아놓고 "어렵더라도 계속 버텨보자"고 말했다.
작년 12월 생계를 위해 식당을 시작했지만, 본업은 영화감독이다.
몇 년 전부터 '요덕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려고 준비해왔다. 그런데 이번 사건 때문에 벽에 부딪혔다고 했다.
"오랫동안 남자 주연으로 점찍은 배우에게 공들이고 있었다.
그 친구만 나서면 투자받기도 쉬워질 것 같고. 식당이 자리 잡으면 촬영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번에 연락해보니 '못 할 것 같다'고 했다. 분위기가 안 좋다면서."
다행히 어제 다시 통화한 정씨는 밝은 목소리였다.
"좋은 소식이 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사 관계자가 영화 '요덕 스토리' 투자를 검토하러 한국에 온다고 한다."
[정성산 감독은]
모스크바大 유학 엘리트
北서 KBS 몰래 듣다가 13년형 선고 받고 탈북
뮤지컬 '요덕스토리' 제작
'1995년1월6일.' 정성산씨가 대한민국에 들어온 날이다.
평양연극영화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영화대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하던 때만 해도
북한에서 잘나가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1994년 북한에서 KBS 사회교육방송을 몰래 듣다가 발각돼 13년형을 선고받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 정씨는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스물여섯 살 청년이었다.
1996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공부했다.
술집 호객 아르바이트도 했고 병원서 시신도 닦으면서 돈을 벌어 단편영화를 찍었다.
영화 '쉬리' 'JSA공동경비구역' '실미도' 시나리오 각색에도 참여했다.
정씨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2006년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연출하면서다.
보름간 2만명 넘는 관객이 몰렸다.
배고파 감자를 훔쳐먹는 아이의 손목을 작두로 자르고,
아들이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장면에 숨이 멎었다.
초등학생부터 고령의 실향민까지 '요덕스토리'를 보며 눈물 흘렸다.
정씨는 2011년 장편 '량강도 아이들'로 상업영화 감독에 데뷔했다.
어린이 눈을 통해 북한 실상을 담은 작품이다.
모노드라마 '땡큐 코리아'(2012), 뮤지컬 '평양 마리아'(2014) 등
한국 현대사와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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